세이난 전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세이난 전쟁은 1877년 일본에서 일어난 마지막 내전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사무라이 계급의 불만과 반발로 인해 발생했다. 사쓰마 번 출신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반란군은 구마모토 성을 공격했으나, 신정부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패배했다. 이 전쟁은 평민 징집병으로 구성된 정부군의 승리로, 사무라이 계급의 몰락과 징병제 확립을 가져왔다. 또한,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일본 경제에 혼란을 초래했으며, 자이바쓰의 형성과 일본 제국주의 발흥의 계기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세이난 전쟁 - 구마모토성
구마모토성은 가토 기요마사가 1607년 완공한 대규모 평산성으로, 독특한 곡선형 돌담인 무샤가에시가 특징이며, 세이난 전쟁과 지진 피해 복구 작업을 거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고 일본 100대 명성으로 선정되었다. - 세이난 전쟁 - 발도대
발도대는 1877년 세이난 전쟁 중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일본 정부군이 백병전 능력 강화를 위해 창설한 검술 특화 부대로,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 검술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고 군가 제정으로 이어져 현재까지도 사용된다. - 1877년 분쟁 -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1877년-1878년)은 1877년 4월 러시아 제국의 선전 포고로 시작되어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에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슬라브 민족 해방, 러시아의 남하 정책, 오스만 제국의 기독교도 학대 문제를 배경으로 러시아군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며, 산 스테파노 조약과 베를린 조약을 통해 발칸 반도의 정치적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 1877년 분쟁 - 루마니아 독립 전쟁
루마니아 독립 전쟁은 1877년부터 1878년까지 루마니아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위해 러시아 제국과 연합하여 싸운 전쟁으로, 승리를 통해 독립을 확고히 하고 국제적 승인을 받았지만 영토 변화도 있었다.
세이난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세이난 전쟁 |
다른 이름 | 서남 전쟁 남서 전쟁 |
로마자 표기 | Seinan Sensō |
기간 | 1877년 1월 29일 – 1877년 9월 24일 |
장소 | 구마모토현 미야자키현 오이타현 가고시마현 |
관련 사건 | 메이지 유신, 시족 반란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일본 제국 |
교전국 2 | 사쓰마 번 |
지휘관 | |
지휘관 1 | 메이지 천황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와무라 스미요시 구로다 기요타카 다니 다테키 |
지휘관 2 | 사이고 다카모리 기리노 도시야키 벳푸 신스케 |
병력 규모 | |
병력 1 | 51,800명 (제국 육군) 5,054명 (제국 근위대) 18,000명 (경찰, 발도대 포함) |
병력 2 | 12,000명 (보병) 200명 (포병) 60문 (대포) |
사상자 및 손실 | |
사상자 1 | 15,000명 (사망 및 부상) |
사상자 2 | 21,000명 (사망 및 부상) 4,000명 (포로 또는 탈영) |
결과 | |
결과 | 제국군의 승리 |
이미지 | |
![]() | |
![]() |
2. 배경
메이지 6년 정변으로 물러난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4년 가고시마현에 사립학교[148]와 그 분교를 설립했다. 이는 사이고처럼 중앙 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족들을 통솔하고 현 내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사립학교는 서구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외국 정벌을 위한 군대 양성을 목표로 했으며, 현 지사 오야마 쓰나요시의 협력 아래 현 정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 세력으로 성장했다.
사립학교 설립 초기, 중앙 정부는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지만, 사립학교가 현 정치를 장악하면서 '반정부 지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보는 시각이 강해졌다. 1876년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는 가고시마현 정치 개혁안을 수락했지만, 현령 오야마 쓰나요시의 반대와 지방의 난 발생으로 대부분 실행되지 못했다.
같은 해 12월, 메이지 정부는 나카하라 히사오 등 경찰관 58명을 파견하여 파괴 활동과 불안에 대한 보고를 조사하게 했다.[3] 이들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후 사이고를 암살하기 위해 파견된 스파이라고 자백했다. 나카하라가 나중에 자백을 번복했지만, 이는 사쓰마에서 널리 믿어졌고, 반란에 반감을 가진 사무라이들이 "사이고를 보호하기 위해" 반란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3]
1877년 1월 30일, 반란을 우려한 메이지 정부는 가고시마에 군함을 보내 가고시마 병기고에 비축된 무기를 압수했다. 이와 함께 사무라이 쌀 봉록 폐지가 발표되면서 갈등이 촉발되었다. 정부의 전술에 분노한 사이고의 사관학교 학생 50명이 소무타 병기고를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고, 이후 사흘 동안 1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해군 조선소와 다른 병기고를 습격했다.[3]
1877년 2월, 메이지 정부는 내무성 관리인 하야시 도모유키와 가와무라 스미요시 제독을 군함 다카오 호에 태워 상황을 파악하도록 파견했다. 사쓰마의 총독인 오야마 쓰나요시는 봉기가 정부의 사이고 암살 시도에 대한 대응이라고 설명하고, 가와무라 제독(사이고의 사촌)이 상륙하여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을 요청했다. 오야마가 떠난 후, 무장한 남자들로 가득 찬 소형 선박들이 ''다카오''호에 무력으로 승선하려고 시도했지만 격퇴되었다.
2월 12일 고베로 돌아온 하야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장군과 이토 히로부미를 만났고, 사이고에게 동조하는 다른 지역으로 반란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 제국 육군을 가고시마에 파견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같은 날, 사이고는 부관인 키리노 도시아키와 시노하라 구니모토를 만나 정부에 질문하기 위해 도쿄로 진군할 의사를 밝혔다.
2. 1. 메이지 유신의 개혁
메이지 유신으로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신정부가 수립되었다. 신정부는 서구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부국강병을 목표로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다.1876년 3월 8일 폐도령(廢刀令)과 같은 해 8월 5일 '금녹공채증서 발행조례'가 발포되었다. 이 두 가지는 칼을 차는 특권과 녹봉 지급이라는 구 무사 최후의 특권을 빼앗는 것이며, 사족에게 정신적ㆍ경제적인 손해를 주었다.[149] 이를 계기로 1876년 10월 24일 구마모토현에서 신푸렌의 난이, 27일 후쿠오카현에서 아키즈키의 난이, 28일 야마구치현에서 하기의 난이 일어났다.[149]
사쓰마는 메이지 유신과 보신 전쟁의 주요 세력 중 하나였으며, 많은 사쓰마 출신 인물들이 새로운 메이지 정부에서 영향력 있는 지위에 올랐지만, 국가의 방향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국가의 근대화는 사무라이 계급의 특권적인 신분을 폐지했고, 그들의 재정적 지위를 약화시켰다. 일본 문화, 언어, 복장, 사회에 대한 매우 빠르고 대규모의 변화는 많은 사무라이들에게 이전 도쿠가와 막부를 전복하는 데 사용된 ''손노 조이''의 ''조이''(오랑캐를 몰아내라) 부분에 대한 배신으로 보였다.[3]
2. 2. 사족의 불만과 반발
메이지 유신 이후 1876년 폐도령과 '금녹공채증서 발행조례'가 발포되면서 사족들은 칼을 차는 특권과 녹봉 지급이라는 마지막 특권마저 빼앗기게 되었다.[149] 이는 사족들에게 정신적, 경제적 손해를 입혔고, 결국 1876년 10월 구마모토현에서 신푸렌의 난이, 후쿠오카현에서 아키즈키의 난이, 야마구치현에서 하기의 난이 연이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149]사쓰마 번은 메이지 유신과 보신 전쟁의 주요 세력이었지만, 국가 근대화 과정에서 사무라이 계급의 특권적 신분이 폐지되고 재정적 지위가 약화되면서 불만이 커져갔다.[3] 많은 사무라이들은 이러한 변화를 도쿠가와 막부 전복에 사용된 존왕양이의 '양이' 부분에 대한 배신으로 여겼다.[3]
이러한 상황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4년 가고시마에 사학관을 설립하여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을 지원하고 고용하였다.[4] 곧 현 전체에 132개의 분교가 설립되었고, 이 학교들은 준군사 정치 조직과 흡사한 모습을 띠며 가고시마 정부를 장악하게 되었다.[4] 1876년 말까지 사쓰마는 중앙 정부로부터 사실상 분리되었다.[4]
2. 3. 사학교의 설립과 사이고 다카모리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4년 가고시마 현 전역에 사립학교[148]와 그 분교를 설립했다. 사이고처럼 사퇴에 불만을 품은 사족들의 통솔과 현 내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해서였지만, 외국인 강사를 채용하거나 우수한 학생을 유럽으로 유학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서구 문화를 받아들여 외국 정벌을 위해 굳건한 군대를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결국 사립학교는 그 여당을 포함해 현 지사 오야마 쓰나요시의 협력 아래 현지 정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사쓰마는 메이지 유신과 보신 전쟁의 주요 세력 중 하나였으며, 많은 사쓰마 출신 인물들이 새로운 메이지 정부에서 영향력 있는 지위에 올랐지만, 국가의 방향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국가의 근대화는 사무라이 계급의 특권적인 신분을 폐지했고, 그들의 재정적 지위를 약화시켰다. 일본 문화, 언어, 복장, 사회에 대한 매우 빠르고 대규모의 변화는 많은 사무라이들에게 이전 도쿠가와 막부를 전복하는 데 사용된 ''손노 조이''의 ''조이''(오랑캐를 몰아내라) 부분에 대한 배신으로 보였다.[3]
사이고 다카모리는 개혁을 초기에는 지지했던 메이지 정부의 고위 사쓰마 지도자 중 한 명이었는데, 그는 만연하는 정치 부패에 특히 우려하고 있었다. 당시 유행하는 판화에는 반란군이 新政厚徳|신세이 코토쿠|새 정부, 풍부한 덕목일본어이라는 글귀가 적힌 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사이고는 1873년 ''정한론'' 논쟁에서 조선과의 전쟁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한때 조선을 직접 방문하여 조선 민족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할 가능성이 높은 결과를 통해 ''전쟁의 명분''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사이고는 전쟁이 궁극적으로 일본에게 성공적일 것이며, 또한 전쟁 초기 단계에서 그가 지지하는 사무라이들이 의미 있고 유익한 죽음을 찾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계획이 거부되자, 사이고는 모든 정부 직책에서 사퇴하고 많은 다른 사쓰마 출신 전직 사무라이들과 함께 군대와 경찰에서 가고시마 고향으로 돌아갔다.[3]

이러한 사람들을 지원하고 고용하기 위해, 사이고는 1874년 가고시마에 사학관이라는 사립 학원을 설립했다. 곧 현 전체에 132개의 분교가 설립되었다. 제공된 “훈련”은 순전히 학문적인 것이 아니었다. 중국 고전이 가르쳐졌지만, 모든 학생들은 무기 훈련과 전술 교육에 참여해야 했다. 사이고는 또한 포병 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들은 무엇보다도 준군사 정치 조직과 흡사했고,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을 정치직에 임명하여 가고시마 정부를 장악하게 한 사쓰마 현지사의 지지를 받았다. 사이고에 대한 지지가 너무 강해서 1876년 말까지 사쓰마는 중앙 정부로부터 사실상 분리되었다.[4]
3. 경과
사이고군이 구마모토 성에 도착하기 전, 메이지 정부는 이미 토벌 명령을 내리고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는 전신 등 근대적 통신망 덕분이었다.[157]
메이지 정부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을 총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가와무라 스미요시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는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항하는 권위를 확보하고, 육군과 해군의 갈등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사쓰마 출신 가와무라를 임명하여 사쓰마 출신자들의 동요를 막으려 했다.
사이고 주도가 장비했던 개틀링 포가 규슈로 보내지는 등, 정부군은 사기가 높았지만 탄약 조달에 문제가 발생했다. 가고시마 창고의 스나이더 총 탄약 제조 설비가 오사카로 옮겨졌으나, 부품 문제로 가동이 어려웠다.[158] 드라이제 총과 스나이더 총은 탄약이 달라 혼란이 있었고, 무라타 쓰네요시는 샤스포 총을 개조하려 했으나[159] 이 또한 보급 혼란을 가중시켰다. 사이고 주도는 탄약 조달을 위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는 등 노력했다.
3. 1. 직접적인 원인
메이지 유신 이후 사이고 다카모리가 1874년 설립한 사학교(私學校)와 1876년 발생한 사족 반란은 세이난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148]사이고는 메이지 6년 정변으로 하야한 후, 1874년 가고시마현 전역에 사학교와 분교를 설립하여 사족들을 통솔하고 젊은이들을 교육했다. 사학교는 서구 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군대를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현지사 오야마 쓰나요시의 협력 아래 현 정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세력으로 성장했다.
1876년 신정부는 폐도령(廢刀令)과 '금녹공채증서 발행조례'를 발포하여 사족의 특권을 빼앗아 정신적, 경제적 손해를 주었다. 이를 계기로 1876년 10월 24일 구마모토현에서 '신푸렌의 난', 27일 후쿠오카현에서 '아키즈키의 난', 28일 야마구치현에서 '하기의 난'이 일어났다. 사이고는 사족들의 반란에 대해 '일으키기로 결심한 이상 천하를 놀라게 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149]
또한, 사이고는 기도 다카요시, 오쿠마 시게노부 등의 '부국(富國)' 중시 노선에 의해 자신의 '강병(強兵)' 중시 노선이 거절당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정부는 사학교를 '반(反)정부 지사 양성 기관'으로 간주하고, 1876년 1월 경시청의 가와지 도시요시 대총경을 통해 사학교 내부 정찰과 이간 공작을 시도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사쓰마 번 출신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증폭시켰고, 결국 세이난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3. 1. 1. 사학교와 사족 반란
메이지 6년 정변으로 하야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4년 가고시마 현 전역에 사학교(私學校)[148]와 그 분교를 설립했다. 이는 사이고처럼 하야에 불만을 품은 사족들을 통솔하고 현 내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함이었다. 사학교는 외국인 강사를 채용하고 우수한 학생을 유럽으로 유학 보내는 등 서구 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굳건한 군대를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사학교는 현지사 오야마 쓰나요시의 협력 아래 현 정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세력으로 성장했다.한편, 근대화를 추진하던 신정부는 1876년 폐도령(廢刀令)과 '금녹공채증서 발행조례'를 발포하여 사족의 특권을 빼앗아 정신적, 경제적 손해를 주었다. 이를 계기로 1876년 10월 24일 구마모토 현에서 '신푸렌의 난', 27일 후쿠오카현에서 '아키즈키의 난', 28일 야마구치현에서 '하기의 난'이 일어났다. 사이고는 사족의 반란을 유쾌하게 생각했으며, '일으키기로 결심한 이상 천하를 놀라게 하겠다'는 의미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149]
사이고는 기도 다카요시, 오쿠마 시게노부 등의 '부국(富國)' 중시 노선에 의해 '강병(強兵)' 중시 노선이 거절당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사학교 설립 이후, 정부는 초기에는 대책을 세우지 않았으나, 사학교 당(黨)이 현 정치를 장악함에 따라 '반(反)정부 지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1876년 내무대신 오쿠보 도시미치는 가고시마 현 정치 개혁안을 수락했으나, 현령 오야마 쓰나요시의 반대와 지방의 난 발생으로 대부분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1876년 1월, 경시청의 가와지 도시요시 대총경이 나카하라 나오오 이하 24명의 경리를 '귀향' 명목으로 가고시마에 파견하여 사학교 내부 정찰과 이간 공작을 시도했다.
1월 29일, 신정부는 가고시마현에 있던 육군성 포병 소속 창고의 무기와 탄약을 오사카로 옮기기 위해 비밀리에 세키류마루(赤龍丸)를 가고시마로 보내 반출했다. 이는 스나이더 총의 탄약 제조 설비를 오사카로 옮기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며, 육군성의 야마가타 아리토모, 오야마 이와오가 협력하여 이루어졌다.
사쓰마번은 영국에서 설비를 수입해 메이지 5년(1872년)에 육군성 설치 이전부터 이미 스나이더 탄약의 국산화에 성공한 유일한 지역이었다. 화약, 탄약, 뇌관만 있으면 사용할 수 있었던 전장식 총과는 달리 후장식 스나이더 총의 탄약(실탄)은 놋쇠를 주재료로 하여 수압 프레스로 성형된 탄피가 필수적이었다. 당시 일본 내에는 이러한 대량 생산 설비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학교 학생은 신정부가 '도둑'처럼 사쓰마의 '재산'을 반출한 사실에 분노하여, 예상되는 충돌에 대비한 무기, 탄약을 입수하기 위해 소모타(草牟田) 화약 창고를 습격하여 총알과 무기를 탈취했다. 이 밤을 시작으로 일본 각지의 화약 창고가 야간에 습격당하는 '탄약 약탈 사건'이 연일 일어났다.
3. 1. 2. 세키류마루와 탄약 약탈 사건
1월 29일, 신정부는 가고시마현에 있던 육군성 포병 소속 창고의 무기와 탄약을 오사카로 옮기기 위해 비밀리에 세키류마루(赤龍丸)를 가고시마로 보냈다. 이 반출은 당시 일본 육군의 주력 장비였던 스나이더 총의 탄약 제조 설비를 오사카로 옮기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육군성의 조슈파와 사쓰마파 대표자 야마가타 아리토모, 오야마 이와오가 협력해 이루어진 일로 기록되어 있다.[150]당시 일본 육군에서 스나이더 총을 주력 장비로 채택하면서, 그 탄약은 사쓰마 번이 설립한 병기, 탄약 공장이 전신인 가고시마의 공장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공급받고 있었다. 후장식 스나이더 총을 재빨리 도입하고, 슈세이칸(集成館) 사업으로 근대 공업 기반을 갖추고 있던 사쓰마 번은 영국에서 설비를 수입해 메이지 5년 육군성 설치 이전부터 이미 스나이더 탄약 국산화에 성공한 유일한 지역이었다. 화약, 탄약, 뇌관만 있으면 사용할 수 있었던 전장식 총과는 달리, 후장식 스나이더 총의 탄약(실탄)은 놋쇠를 주재료로 수압 프레스로 성형된 탄피가 필수적이었고, 이것이 없으면 총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탄피 토대는 단순한 구조였기 때문에 개인 수준의 소규모 생산은 가능했지만, 군에서 전투에 사용하기 위한 분량을 확보하려면 전용 대량 생산 설비가 필요했고, 그 정도 설비는 당시 일본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공업 기반 유무는 당시 일개 지방에 불과했던 가고시마와 신정부 사이의 역학관계를 균형 짓고 있던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또한 옛 사쓰마 번 무사들은 가고시마 창고의 화약, 총알, 무기, 제조 기계류는 번의 무사가 갹출한 돈으로 만들거나 사들인 것으로서, 유사시에 필요한 경우 그 자금을 댄 번의 무사나 그 자손들이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학교 학생들은 신정부가 '도둑'처럼 사쓰마의 '재산'을 반출한 사실에 분노했고, 예상되는 충돌에 대비해 무기와 탄약을 입수하고자 밤중에 소모타(草牟田) 화약 창고를 습격하여 총알과 무기를 탈취했다. 이날 밤을 시작으로 일본 각지의 화약 창고가 야간에 습격당하는 '탄약 약탈 사건'이 연일 일어났다(사학교 학생이 입수한 것은 야마가타와 오야마가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던 구형 엔필드 총과 그 탄약뿐이었다). 스나이더 탄약 제조 설비를 잃은 것은 사쓰마를 상징하는 신병기였던 스나이더 총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이미 구식화된 전장식 엔필드 총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보신 전쟁에 참전했던 사이고를 비롯한 많은 사쓰마 사족들은 후장식과 전장식의 연사 속도 차이가 초래하는 결정적인 전력 차이를 직접 체험하여 잘 알고 있었다.
3. 1. 3. 사이고 암살 계획
1877년 1월 30일, 사학교 간부 시노하라 구니모토, 고노 슈이치로, 다키 시치노조 등 7명은 회합을 열고 다니구치 도타에게 나카하라 나오오 등 경시청의 내탐(정부의 비밀 조사)을 의뢰했다. 같은 날 저녁, 다니구치의 정보로 나카하라 일행의 귀향 목적이 사이고 다카모리 암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151]시노하라, 후치베 군페이, 이케노우에 시로, 고노 슈이치로 등 사학교 간부는 대책을 논의하여 고네지메(小根占, 현재 미나미오스미정)에서 사냥 중이던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그의 넷째 동생 사이고 고베를 파견했다. 또한 탄약 약탈 사건 소식을 듣고 요시다무라(吉田村)에서 가고시마로 돌아온 기리노 도시아키는 시노하라 구니모토 등과 협의하여, 2월 2일 헨미 주로타 등 3명을 고네지메로 보냈다.
사이고 고베와 헨미에게서 탄약 약탈 사건의 전말을 들은 사이고는 '아차!'하고 중얼거렸고, 암살 계획 소문으로 격앙된 사학교 학생들을 수습하기 위해 가고시마로 돌아왔다.[152]
1877년 2월 3일, 사학교 당원들은 나카하라 등 60여 명을 일제히 체포하여 고문했고, 그 결과 가와지 도시요시 대총경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암살하도록 지시했다는 '자백서'를 받아냈다. 이로 인해 많은 사학교 학생들이 격분하여 폭발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153]
3. 2. 사이고군의 결성과 출발
메이지 6년 정변으로 하야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4년 가고시마현 전역에 사학교(私學校)와 그 분교를 창설하였다.[148] 사이고처럼 하야에 불만을 품은 사족들의 통솔과 현 내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해서였지만, 외국인 강사를 채용하거나 우수한 학생을 유럽으로 유학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서구 문화를 받아들였다.사학교 설립 이래, 정부는 초기에는 대책을 세우지 않았지만, 사학교 당(黨)에 의한 현 정치 장악이 계속됨에 따라 사학교를 '반(反)정부 지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보는 시각도 본격화되었다.
2월 4일 밤, 고네지메에서 돌아온 사이고는 간부들을 거느리고 사학교 본교로 들어갔다. 다음 날 5일, 사학교 간부 및 분교장 200여 명이 집합하여 대 평의(評議)가 행해져 차후의 방침이 의논되었다.
벳푸 신스케와 헨미는 죄를 묻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가야마 야이치로는 사이고, 기리노, 시노하라 셋이 상경하여 정부를 힐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야마노 다잇포, 고노 슈이치로가 동조했지만, 이케노우에는 암살을 꾸미는 정부가 상경 도중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하여 반대하였다. 무라타 산스케는 세 사람에게 적은 병력이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노무라 오시스케는 노무라 자신이 적은 병력을 이끌고 해로로 오바마(小濱)로 나와 거기서부터 육로로 교토에 가서 천황에게 직접 아뢰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당시 천황은 행차 문제로 교토에 있었다)
이리하여 여러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최후에 기리노가 "단(斷)이라는 한 글자만 있을 뿐, … 군대의 총 출병 외에 취할 수 있는 길은 없다."라고 단안하여 전군 출병론을 많은 사람이 찬성하였다.(나가야마는 이후로도 출병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기리노의 설득에 후일 종군을 승낙) 2월 6일, 사학교 본교에 '사쓰마 본당'이라는 문패가 걸려 종군자 명부 등록이 시작되었다. 이 날, 사이고를 중심으로 작전 회의가 열려 고베의 '해로에서 나가사키를 빼앗아, 거기서 군을 둘로 나누어 고베, 오사카와 요코하마, 도쿄의 본거지를 급습'하자는 안과 노무라의 '세 길로 나누어, 하나는 해로로 나와 나가사키에서 상경, 하나는 해로에서 부젠(豊前), 분고(豊後)를 지나 시코쿠, 오사카에서 상경, 하나는 구마모토, 사가(佐賀), 후쿠오카(福岡)를 지나 육로로 상경'하는 즉 3도 분진(分進)안이 나왔지만 고베, 노무라의 안은 증기선 3척의 군함밖에 가지지 않은 사쓰마군에게는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이케노우에의 '구마모토성에 일부 방비역을 두고 주력은 육로로 상경'하는 안이 채용되었다.[154][155]
2월 8일에 부대 편성이 개시되었다. 2월 9일, 사이고의 친척 가와무라 스미요시 중장이 군함을 타고 사이고에게 면회하러 왔지만 만나지 못하고 현 지사 오야마 쓰나요시와 가고시마 만 내의 함선 위에서 회견하였다.
사이고군에서는 시노하라가 편성 책임자가 되었고 기리노가 군수품 수집 조달, 무라타 신파치가 병기 조달 정리, 나가야마 야이치로가 신병 교련, 이케노우에가 모병을 각각 담당하였고, 12일 즈음에 대강의 준비가 되었다. 모병, 신병 교련을 끝낸 사쓰마군에서는 2월 13일, 대대 편성(저격대, 마바리부, 1~5번 대대, 독립 대대인 6~7대대 즉 기지마貴島 부대)이 이루어졌다.
2월 14일, 사학교 학교 옆의 연병장[156]에서, 승마 한 사이고에 의해 1번~5번 대대의 열병식이 행해졌다. 다음 날 15일, 60년 만의 폭설이라 불리던 눈보라 속에서 사쓰마군의 1번 대대는 가고시마에서 구마모토 방면으로 먼저 출발하였다. 세이난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후 계속해서 대대가 가고시마를 출발하였다. 17일에는 사이고 다카모리 자신도 기리노와 함께 출발하여, 가지키ㆍ히토요시(人吉)를 지나 구마모토로 향했다. 같은 날, 독립 부대도 가지키를 출발하였다. 한편 가고시마에서 귀경한 가와무라 중장에게서 사이고군의 문죄(問罪) 출병 정보를 얻은 정부는 2월 19일, 가고시마 현 반역자 토벌의 조서를 얻어, 정식으로 사이고군에 대해 출병하기로 결정되었다.
3. 3. 토벌군 파견
메이지 정부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을 가고시마 현 반역자 토벌 총독(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실질적인 총사령관인 부사령관에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육군 중장과 가와무라 스미요시 해군 중장을 임명하였다. 이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인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항하여 권위 있는 귀족을 내세우고, 육군과 해군의 세력 다툼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32]또한, 사쓰마와 조슈의 균형을 맞추고 사이고의 친척인 가와무라를 추가하여 사쓰마 출신자들의 동요를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과거 사이고 휘하에서 어전친병·육군성 창설을 위해 일했으며, 가고시마 사립학교 학생들을 격앙시킨 가고시마 스나이더 탄약 제조 설비 반출에서는 사쓰마 파벌의 오야마 이와오에게 협력하는 등, 사쓰마 파벌 내부의 사이고 대 오쿠보 도시미치의 싸움에 조슈 파벌이 편승하는 구도가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제1여단(노즈 시즈오 소장), 제2여단(미요시 시게오미 소장), 별동 제1여단(다카시마 도모노스케 대좌), 별동 제2여단(야마다 아키요시 소장) 외에 가와지 도시요시 소장 겸 대경시가 이끄는 경시대(후에 별동 제3여단의 주력) 등이 출동하고, 순차적으로 다른 여단도 출동했다. 그중 징모 순찰(임시 징집 순경)로 편성된 신센 여단은 사족을 중심으로 한 여단으로, 그 명칭 때문에 신센구미가 재편성된 것으로 오인되기도 했다(실제로 전 신센구미 대원도 소속되어 있었다).[34]
타이완 출병 시 사이고 주도가 장비했던 개틀링 포도 규슈로 보내졌다.[35][36] 징병으로 구성된 정부군은 강한 사쓰마 사족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 상당한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보병총 탄약 조달에 문제가 발생했다.
스나이더 총이 육해군에 제식 채용된 이후, 그 탄약 공급이 가고시마 창고들이 독점했기 때문에, 중요 거점인 도쿄·오사카의 군사들에게는 드라이제 총을 장비한 병사가 많았다. 그러나 드라이제 총과 스나이더 총은 전혀 다른 탄약을 사용했다.
보급의 혼란을 막기 위해 육군성은 규슈에 파견시킨 병사의 장비를 일단 스나이더 총으로 통일시켜 보냈다.[39] 그러나 동원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3월 초에 이미 500만 발의 스나이더 탄약 비축량을 소진하여 탄약이 부족해졌다. 이 시기 규슈에서는 여전히 격전이 계속되고 있었고, 더욱 1,800만 발의 조달이 필요하다고 추산되었기 때문에,[37][38][40] 대량의 탄약 재고가 남아 있던 드라이제 총을 규슈로 보낼 계획이 검토되었다.[41] 실제로 와카야마 (구 기슈 번)의 긴급 소집 부대는 번병 시대부터 사용해 온 드라이제 총 장비를 그대로 규슈로 파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사카 진대의 의보병 등 후방 부대도 드라이제 총을 장비하고 파견되었다.[42][43]
이 외에도, 후에 무라타 총 개발로 유명해진 무라타 쓰네요시가 구 막부로부터 인계받은 샤스포 총을 스나이더 총과는 다른 금속 약통을 사용하는 탄약용으로 개조하려는 계획[44]을 세우는 등, 더욱 보급을 혼란시킬 수 있는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
스나이더 탄약 조달을 담당한 육군성의 사이고 주도와 하라다 이치도는 대량의 탄약을 조달하기 위해 해군성으로부터 탄약 제조 설비를 빌리거나[45], 외국 상인으로부터 공약통 500만 개 구매 계획을 세우거나[46], 또는 청나라로부터 탄약을 빌리는[47] 등, 전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의 화력을 지원하는 탄약 조달에 동분서주했다.
3. 4. 구마모토 성 강습과 고쿠라(小倉) 전격 작전
2월 19일, 구마모토 진다이(熊本鎮台)가 지키는 구마모토 성(熊本城)에서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했다. 격렬한 바람을 타고 불길이 번져 천수각까지 불타버렸다.[48] 이 화재로 1개월간 농성에 필요한 군량미와 땔나무 대부분이 소실되었다.[49]2월 20일, 벳푸 신스케가 이끄는 가지키(加治木)의 여러 부대가 가와지리(川尻)에 도착했다. 같은 날 밤, 구마모토 진다이 참모장 가바야마 스케노리 중좌의 제안으로 파견된 정찰대가 벳푸 부대에 발포하면서, 세이난 전쟁의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52] 사쓰마군은 구마모토 진다이 측이 농성할 태세임을 파악하고, 21일 밤 가와지리에서 군의를 열었다.[51]
군의에서는 이케가미 시로가 주장하는 "구마모토에 병력을 남기고 주력은 동쪽으로 진격한다"는 방안과 시노하라 구니모토 등이 주장하는 "전군에 의한 구마모토성 강습" 방안이 대립했으나, 강습 방안이 채택되었다. 2월 21일 자정부터 22일 새벽에 걸쳐 사쓰마군 대대는 차례로 구마모토를 향해 출발, 구마모토 성을 포위했다. 기리노 도시아키의 제4대대, 이케가미의 제5대대는 정면 공격을, 시노하라 구니모토의 제1대대, 무라타 신파치의 제2대대, 벳푸 신스케의 가지키 대대, 그리고 나가야마 야이치로의 제3대대 일부는 후면 공격을 담당했다. 또한, 사쓰마군에 합류한 구마모토 사족이자 학교당 수령인 이케베 기치주로가 이끄는 구마모토 부대 병사들이 사쓰마군 각 대대의 안내자 역할을 맡았다.[51]
구마모토 진다이 측은 사령관 다니 다테키 소장[53], 참모장 가바야마 스케노리 중좌[54]를 비롯하여 고다마 겐타로 소좌[55], 가와카미 소로쿠 소좌[56], 오쿠 야스카타 소좌[57], 오가와 마타지 대위[58], 오사코 나오하루 대위[59] 등, 훗날 주요 군인 및 정치가가 되는 인물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전력은 사쓰마군 약 14,000명, 진대군 약 4,000명이었다.
2월 22일 새벽, 사쓰마군의 구마모토성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케가미 부대 2,000명은 지바성의 보루와 교마치구치의 매문을 공격했으나, 진다이 측의 격렬한 포격에 막혔다. 현청 부근까지 접근했던 기리노 부대 800명도 격퇴되었다. 성 서쪽 끝 후지사키다이 서쪽 단야마는 성내 돌입의 주요 거점이었기에[60] 사쓰마군은 시노하라, 무라타, 벳푸 각 부대 합계 3,000명을 투입했으나, 진다이 측도 보병 제13연대 제3대대(대대장: 오가와 마타지 소위) 등 강력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격전 끝에 오전 10시경 사쓰마군이 단야마를 점령했지만, 진다이 측의 맹공으로 성곽에는 접근하지 못하고 공격을 종료했다.[61]
한편, 고쿠라(小倉)의 보병 제14연대장 노기 마레스케 소좌는 구마모토 성 농성 결정에 따라 부대를 이끌고 남하, 22일 다카세(高瀬)에 도착했다. 구마모토 방향의 연기를 본 노기는 병사 60명을 이끌고 우에키(植木)로 향했다.[63]
오후 3시, 사쓰마군은 무라타 산스케, 이토 나오지 소대를 우에키에 파견했다. 오후 7시, 노기 부대 200명과 무라타 부대가 교전하여 무라타 부대가 격퇴되었으나, 이토 부대가 합류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와키리 마사쿠로가 제14보병연대의 군기를 빼앗는 일도 벌어졌다. 승리한 사쓰마군이었지만, 두 부대 모두 지쳐 노기 부대를 추격하지 않고 철수했다.[63]
22일 밤, 본영에서 열린 작전회의에서는 구마모토성 공격 지속 여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강행 중지를 결단하고, 구마모토성을 포위하는 한편, 나머지는 북상하여 고쿠라(小倉)를 기습하기로 결정했다.[64]
23일, 6개 소대가 고쿠라를 향해 출발했으나, 우에키(植木), 기요하(木葉)에서 노기의 보병 제14연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그러나 구마모토성 강습을 포기하지 못한 시노하라와 벳푸 등의 부대는 23일에도 공격을 계속했고, 결국 이케가미 부대 3,000명으로 포위를 실시하면서, 기리노 부대가 야마가(山鹿) 방면, 시노하라 부대가 다바루자카(田原坂) 방면, 무라타, 벳푸 부대가 기도메 방면으로 진출하여 남하하는 정부군 주력을 기다리는 형태가 되어, 고쿠라 기습 작전은 실패했다.[64]
3. 5. 사쓰마군 주력 북부진출과 포위
사쓰마군은 대포와 장비가 뒤떨어진 소총으로 구마모토성을 지키는 신정부군을 공격하는 무모한 작전을 펼쳤다. 신정부군은 우세한 대포와 소총, 충분한 탄약을 보유하고 있었다.[3] 2월 21일부터 24일까지 사쓰마군의 공격은 모두 실패했고, 많은 무사들이 이 공성전에서 소모되었다. 24일 이후 양측은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사쓰마군은 남쪽에서 진군해 오는 신정부군과 상륙이 예상되는 신정부군, 그리고 구마모토 부대에 대응하기 위해 구마모토성 강습 대신 포위 전략을 선택했다.
3. 5. 1. 다카세(高瀨)부근 전투
2월 26일, 사이고 군(사쓰마군)의 에치젠 3개 소대는 신정부군(정토군)의 다카세 진출에 대응하여 야마부타와 시로시타 사이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사사 등의 구마모토 대 3개 소대 및 이와키리·고다마 등의 3개 소대는 데라다와 다테야마 사이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다카세 방면으로의 진격을 저지하려 했다. 이케베 기주로의 구마모토 대 주력은 사사 등의 부대가 고전 중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받고 데라다로 진격했다. 야마가의 노무라 부대는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정토군은 사쓰마 군 주력의 북진을 알지 못하고, 전면의 사쓰마군이 아직 우세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미요시 소장 지휘의 제2여단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병력 배치를 정했다.구분 | 지휘관 | 병력 구성 |
---|---|---|
제1진 | ||
선봉 | 노기 기덴 소좌 | 4개 중대 |
중군 | 사코다 대위 | 2개 중대 |
후군 | 오사코 대위·지시키 대위 | 2개 중대 |
제2진 | ||
예비대 | 하세가와 중좌 | 4개 중대 |
야마가 방면 수비대 | 쓰시타 소좌 | 3개 중대 |
지원(총예비대) | 2개 중대, 1개 대대 우반대 |
26일 오전 5시, 선봉인 노기 부대는 이시누키를 출발하여 기쿠치 강을 건너 사쓰마군 우익의 고세 부대를 기습했다. 여기에 후위의 지시키 대위 지휘의 1개 중대가 더해짐으로써 정오에는 고세 부대가 우에키 방면으로 패주했다. 노기의 제14연대는 이를 맹추격하여 기바를 거쳐 다바루자카 위까지 진출하고, 노기는 제2여단장 미요시에게 다바루자카 확보를 건의했지만, 미요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후퇴를 지시했다. 이 판단은 이후 정토군에게 큰 어려움을 안겨주게 된다.[66]
이 무렵, 기리노, 시노하라, 무라타, 베푸 등이 이끄는 사쓰마군 주력은 오쿠보(구마모토시 북쪽)에 집결 중이었다. 사쓰마군 주력은 오쿠보에서 좌·중·우 3개 부대로 나뉘어, 고세 및 고세로 진격하는 정토군을 협공할 계획이었다.
- 우익대(야마가 방면) - 기리노 도시아키(3개 소대 약 600명)
- 중앙대(우에키·기바 방면) - 시노하라 구니모토·벳푸 신스케(6개 소대 약 1,200명)
- 좌익대(요쓰지·이쿠라 방면) - 무라타 신파치(5개 소대 약 1,000명)
사쓰마군 우익대는 27일 새벽, 야마가에서 기쿠치 강을 따라 남하하여 다마나 부근의 정토군 좌익을 공격했다. 중앙대는 다바루자카를 넘어 기바에서 정토군 수색대와 전투를 벌였고, 좌익대는 요쓰지 고개·하라쿠라로 진격하여, 여기서 우종대는 고세 교로, 좌종대는 이쿠라·오하마를 거쳐 이와사키하라로 진출했다. 제2여단은 수색대의 보고와 각지에서 온 급보로 비로소 사쓰마군의 대규모 습격을 인지하고, 각지에 증원 부대를 파견하는 동시에 미요시 여단장이 직접 사코마로 진출했다. 양군의 전투는 격렬하여, 미요시 소장이 총상을 입을 정도였다.[68]
오전 10시경, 기리노가 이끄는 우익대는 우회하여 이시누키에 있는 정토군의 후방 연락선을 공격했다. 이때 제2여단 본영에 있던 노즈 미치쓰라(노즈 시즈오 소장의 친동생) 대좌는 여단 간부와 협의하여 증원을 보내는 동시에 이나리 산 확보를 명령했다. 이 산을 점령한 정토군은 여러 번 점령을 시도하는 사쓰마군 우익대를 내려다보며 사격하여 물리쳤다. 이나리 산은 낮은 언덕이었지만, 이 지역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이곳을 둘러싼 쟁탈전은 세이난 전쟁의 덴노 산이라고도 불린다.[69]
사쓰마군 좌익대는 기쿠치 강 하류에서 공세를 강화하여, 중앙대에 속한 사이고 고헤이의 부대 등과 공동으로 요격해 온 보병 제8연대와 교전하여, 이를 후퇴시켰다. 사쓰마군은 전체적으로 우세했지만, 오후 2시경 중앙대가 탄약 부족을 겪고, 좌우의 부대에 알리지 않고 갑자기 후퇴를 시작했다. 증원을 얻은 정토군 중앙 각 부대는 반격에 나섰다. 사이고 고헤이·아사에 나오노스케·사가라 기치노스케 3개 소대도 적전 도하를 강행하는 등 고세 탈환을 시도했지만 정토군의 증원에 밀려, 사이고 고헤이는 시게네기 제방 위에서 가슴에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좌익대는 고전 끝에 오후 4시경 이쿠라로 후퇴하고, 전장에 남겨진 우익대는 3방향에서 공격을 받게 되었다. 남하해 온 노즈 시즈오 소장의 병력이 우익대의 우측면을 공격했기 때문에, 기리노가 이끄는 우익대도 에다 방면으로 후퇴했다. 정토군 측도 피로하여 추격하지 못했다.[70]
고세 전투는 사쓰마군 최고의 야전 지휘관(기리노, 시노하라)이 함께 참여했고, 야전에서 공세에 나선 유일한 전투였다. 그러나 무단 후퇴한 시노하라나 야마가에 10개 소대를 남겨두고 3개 소대만 이끌고 싸운 기리노 등, 그 작전 지휘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기리노에게 1,000명의 병력이 더 있었다면 이나리 산 탈환도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71] 결국 사쓰마군은 중요한 결전에서 패배하고, 이후로는 수세로 돌아서게 된다.
3. 5. 2. 다바루(田原)언덕, 기치지(吉次)고개 전투
3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구마모토현 가모토 군 우에키 정(현 구마모토시 기타 구 우에키 정)에서 다바루자카·기치지 고개 전투가 벌어졌다. 초봄의 추위와 비가 잦은 혹독한 날씨 속에 전투가 전개되었다.[72]다바루자카는 다카세에서 우에키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언덕으로, 해발 고도는 최대 100m 정도이다. 지형적으로 큰 요새는 아니지만, 언덕의 굴곡과 험한 길이 방어에 유리했다. 또한, 하카타에서 구마모토로 가는 길 중 대포를 운반할 수 있는 넓은 도로는 다바루자카 길뿐이었다.[73]
3월 4일, 신정부군은 다바루자카 방면을 주공, 기치지 고개 방면을 조공으로 하여 전면 공세를 시작했다. 다바루자카 방면에서는 근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대대장: 야마구치 스토미 소좌)를 주축으로 한 본대가 히라하라·오히라를, 보병 제14연대 일부로 구성된 우익대가 다바루자카를 공격했다. 그러나 견고한 사쓰마 군 진지를 돌파하지 못했고, 노즈 소장이 직접 다루키까지 나가 독려했으나, 후타마타 대지(다바루자카 구릉과 계곡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를 점령하는 데 그쳤다.
같은 시각, 기치지 고개에서도 양측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제2여단 참모장 노즈 미치쓰라 대좌가 이끄는 부대가 짙은 안개를 틈타 기치지 고개 북쪽 반고산을 점령하려 했다. 시노하라, 무라타 두 대대장이 반격에 나서 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근위 제1연대 제2대대장 에다 쿠니미치 소좌는 은장도를 찬 시노하라를 발견하고 사격을 명령했다. 시노하라는 전사했지만, 분노한 사쓰마 군의 맹공으로 에다 소좌도 전사하고, 노즈 부대는 하라쿠라까지 후퇴했다.[74]
사쓰마 군의 위협적인 백병전에 대응하기 위해, 신정부군은 3월 13일 우에키구치 경시대에서 검술이 뛰어난 경찰관을 선발하여 발도대(拔刀隊)를 편성했다. 3월 14일, 신정부군은 다바루자카 공격에 발도대(拔刀隊)를 투입했다. 발도대(拔刀隊)는 3개의 보루를 탈취했지만, 후속 부대의 지원이 없어 사쓰마 군의 반격에 후퇴했다. 그러나 발도대(拔刀隊)가 사쓰마 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후 발도대(拔刀隊)의 활약을 기념하여 군가 '발도대(拔刀隊)'가 만들어졌다.[75]
3월 15일, 신정부군은 요코히라야마 공격에 발도대(拔刀隊) 50명을 추가하여 맹공을 가했다. 발도대(拔刀隊)는 사쓰마 군의 방어를 뚫고 요코히라야마(나치산)를 점령했다. 신정부군이 사쓰마 군의 방어선을 처음으로 돌파한 것이다.[76] 3월 16일은 전선 정리를 위해 휴전했다. 3월 17일, 신정부군은 서쪽과 정면에서 공격을 재개했지만, 지형을 이용한 사쓰마 군의 저항에 막혀 다바루자카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3월 4일부터 신정부군의 전사자는 약 2,000명, 부상자도 2,000명에 달했다.[76]
3. 5. 3. 우에기(植木), 기도메(木留)전투
3월 23일, 신정부군은 우에기, 기도메를 공격하여 일진일퇴의 진지전을 벌였다.[77] 4월 2일, 신정부군은 기도메를 점령했고, 사쓰마군은 헤타노(邊田野)로 후퇴했다. 헤타노, 기도메의 취락은 불에 탔다.[77] 4월 8일, 헤타노 방면은 격전이 벌어졌고, 신정부군은 하기사코(萩迫)의 가키노키(枾木) 포대를 점령하였다.[77] 4월 15일, 사쓰마군은 우에키, 기도메, 구마모토 방면에서 철수하여 성 남쪽 방면으로 물러났다.[77]3. 5. 4. 도리스(鳥巢) 방면
3월 10일부터 사쓰마군이 도리스(鳥巢) 지역 방어를 시작했고, 4월 15일 철수할 때까지 신정부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4월 5일 신정부군 제3여단이 도리스를 공격했을 때, 사쓰마군의 히라노 부대와 신구지 부대가 수비하고 있었으나, 허를 찔려 순식간에 패주했다. 4월 10일부터 4월 13일까지 신정부군의 도리스 재공격이 이어졌고, 사쓰마군도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77]3. 6. 사쓰마군의 장기간 포위책의 파탄과 신정부군 충배군(衝背軍)의 상륙
구로다 기요타카가 이끄는 신정부군 충배군은 부대를 편성하고, 여러 방면으로 일제 진격을 시도하였다.방면 | 부대 |
---|---|
고사, 미후네, 요시노(吉野) | 별동 제3여단 |
구마노쇼(隈庄), 나마즈무라(鯰村), 가미지마(上島) | 별동 제1여단 |
위 여단의 예비 부대 | 별동 제1, 제2여단의 일부 |
미도리 강, 가와지리 | 별동 제2여단, 별동 제4여단 |
4월 12일, 별동 제3, 제1여단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별동 제1여단은 미야지(宮地)를 출발하여 미도리 강을 건너 사쓰마군을 공격하였다. 사쓰마군은 계속되는 패전으로 기세가 꺾여 민가에 방화하고 퇴각하였다. 나가야마 야이치로는 패주하는 사쓰마군 병사를 독려했지만, 전황을 뒤집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민가를 매입, 불을 질러 할복하였다. 이로써 미후네는 신정부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같은 날 별동 제2여단은 신 강(新川)둑에서 사쓰마군의 맹사격에 저지당했고, 제4여단도 진격을 저지당했다. 4월 13일, 별동 제2여단은 별동 제4여단과 연계하여 가와지리로 진격했다. 별동 제4여단의 일부가 닛타(新田)를 공격하여 사쓰마군을 견제하는 사이, 주력 부대는 미도리 강을 건너 사쓰마군과 격전을 벌이며 가와지리로 향했다. 양쪽에서 공격을 받은 사쓰마군은 패퇴했고, 신정부군은 가와지리를 점령했다.
3. 6. 1. 구마모토 성 포위
사쓰마군은 구마모토성을 장기간 포위하면서 성 안의 식량이 바닥나기를 기다리는 전략을 채택하고, 주로 대포를 이용해 공격했다. 사쓰마군 주력이 북쪽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구마모토 진다이의 수비 부담은 다소 줄었으나, 개전 전 화재로 식량 보충이 충분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포위군이 감소하자, 기리노 도시아키는 구마모토 부대의 제안을 받아들여 3월 26일 쓰보이 강과 이세리 강의 물을 성 주변으로 끌어들였다.[3]3. 6. 2. 충배군(衝背軍)상륙
신정부군 남하군은 2월 다카세 전투 이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최초의 충배군은 3월 18일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야쓰시로로 향한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대좌가 이끄는 별동 제2여단이었다.[78] 이들은 히나구에 상륙하려 했으나 사쓰마군의 경계로 인해 야쓰시로 남쪽 3km 지점인 스구치 해변으로 상륙 지점을 변경했다. 구로키 다메모토가 이끄는 보병 제12연대와 경시대 500명은 사쓰마군 1개 소대의 저격을 받았으나, 봉황의 지원 사격으로 격파하고 야쓰시로를 점령했다.[78]사쓰마군 본영은 충배군의 상륙에 큰 충격을 받고 남하군 편성에 착수했다. 3번 대대장 나가야마 야이치로가 직접 지휘를 맡아 3개 중대를 편성, 남하하여 미야하라, 가가미 부근에서 충배군과 교전했다.
3월 24일, 나가사키를 출발한 별동 제2, 3여단은 25일 오후 야쓰시로에 상륙하였다. 3월 21일에는 구로다 기요타카 참군이 별동 제2여단의 나머지를 이끌고 히나구에 상륙했고, 25일에는 야마다 아키요시 소장이 이끄는 제2여단(기존 제2여단은 제1여단으로 개칭)과 가와지 도시요시 소장이 이끄는 제3여단(경시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편성)이 상륙했다. 이로써 충배군은 총 8,000명 규모로 증강되었다.
3. 6. 3. 오가와(小川)방면 전투
3월 26일, 구로다 기요타카 참군(参軍) 지휘 아래 척배군(衝背軍)은 좌익에 별동 제1여단, 중앙에 별동 제2여단, 우익에 경시대를 배치하고, 해군 함선의 함포 사격 지원을 받으며 세 방향에서 오가와(小川) 방면의 사쓰마군(薩軍)을 공격하여 격퇴하고 오가와를 점령했다.[22]이때 사쓰마군 지휘관 나가야마 야이치로는 "여러분, 어찌 이리 겁을 내는가. 만약 적에게 이곳을 빼앗긴다면, 구마모토성 외곽의 우리 수비병은 어찌 될 것인가. 큰일은 이것에 달려 있다. 살아서 선인(善士)이라 칭송받고, 죽어서 충신(忠臣)이라 칭송받는 것은 오직 이때뿐이다. 각자 필사적으로 싸워 칼이 부러지고 화살이 다 떨어진 후에야 그만두어라!"[22]라며 병사들을 격려했지만, 전황을 뒤집지는 못했다.
3. 6. 4. 마쓰바세(松橋)부근 전투
1877년 3월 30일, 구로다 기요타카가 이끄는 정부군은 별동 제3여단을 시켜 마쓰바세(松橋) 동쪽의 도요노무라(豊野村)를 점령하게 하고, 나머지 2개 여단으로 마쓰바세를 포위하는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사쓰마군은 완강하게 저항했다. 갑작스러운 폭우가 내리고, 사쓰마군이 미후네시나다(御船新田)의 수문을 일부러 파괴하여 바닷물을 끌어들이는 바람에, 공격하던 정부군은 진흙탕 속에서 싸워야 했고 몹시 지쳐버렸다.[79]고시마 도모노스케(高島鞆之助) 소장(승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각 부대는 전진했던 지점에서 밤을 보냈다. 다음 날인 3월 31일, 썰물 때를 이용하여 별동 제1여단은 진격을 다시 시작하여 야마세(山背)와 혼도(本道) 양쪽에서 마쓰바세를 공격했다. 별동 제1여단은 기타토요사키(北豊崎)에서 미후네로 진격하여 사쓰마군의 오른쪽을 공격했다. 이를 버티지 못한 사쓰마군은 가와지리(川尻)로 물러났고, 정오에는 마쓰바세가 함락되었다.[79]
3. 6. 5. 우토(宇土), 가타시다(堅志田), 미도리(綠)강 전투
4월 1일, 별동 제1여단이 사쓰마군 야습 부대를 추격하여 우토를 점령하였다.[79] 4월 6일에는 구로카와 미치노리 대좌가 이끄는 별동 제4여단 약 2,600명이 우토반도(宇土半島)에 상륙하여 척배군에 배속되었다.[79]3. 6. 6. 미후네(御船) 전투
구로다 기요타카 참군은 충배군(衝背軍)의 부대를 편성하고, 여러 방면으로 일제 진격을 시도했다. 4월 12일, 별동 제3여단과 제1여단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같은 날 별동 제2여단은 신 강(新川)둑에서 사쓰마군의 맹렬한 사격에 저지당했고, 제4여단도 진격을 저지당했다.[80]3. 6. 7. 충배군의 구마모토 입성
4월 12일, 구마모토에 도착한 구로다 기요타카가 이끄는 제국군 주력 부대는 야마카와 히로시가 이끄는 부대의 지원을 받아 수적으로 열세였던 사쓰마군을 격퇴했다.[3] 4월 13일 별동 제2여단의 야마카와 히로시 중좌는 미도리 강 모래톱에 있었지만, 아군이 가와지리에 돌입하는 것을 보고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병력을 나누어 직접 선발대를 이끌고 구마모토성으로 돌입했다.[81]3. 6. 8. 사쓰마군의 야쓰시로 급습
이 무렵, 사쓰마군은 다바루 방면 전투가 격화되면서 병력이 부족해졌다. 이에 기리노 도시아키의 명령으로 후치베 군페이, 베푸 신스케, 헨미 주로타 등이 가고시마로 돌아가 새로운 병력을 모집했다. 3월 25일과 26일에 걸쳐 약 1,500명을 징병하여 9번대와 10번대를 편성했지만, 야쓰시로에 상륙한 정부군(충배군) 때문에 이 병력은 구마모토에 있는 사쓰마군과 합류할 수 없었다.[80]3월 31일, 협동대의 미야자키 하치로는 기리노 도시아키의 지시를 받고 히토요시에서 내려와 정부군의 보급기지였던 야쓰시로를 공격하여 정부군의 퇴로를 차단, 고립시키는 작전을 펼쳤다.
4월 4일, 히토요시에서 구마가와를 따라 또는 배를 타고 내려와 야쓰시로 남쪽 교외에 도착한 사쓰마군은 먼저 사카모토무라의 정부군(별동 제2여단 1개 중대)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80] 이후 4월 5일과 6일 승리를 거두며 야쓰시로에 접근했지만, 7일과 8일 정부군의 반격으로 야쓰시로에 도달하지 못하고 다시 사카모토 부근까지 밀려났다.
4월 11일, 사쓰마군은 다시 야쓰시로를 공격했다. 정부군은 피로 때문에 일시적으로 후퇴했지만, 4월 13일에 증원군이 투입되어 사쓰마군과 정부군 모두 물러서지 않고 4월 17일까지 대치했다. 4월 17일, 1개 대대가 사쓰마군 우익을 공격하는 작전이 성공하여 정부군이 유리해지자 사쓰마군은 패주했다. 이 과정에서 하기와라제키(萩原堤) 전투에서 협동대의 미야자키 하치로가 전사하고, 베푸 신스케가 다리에 중상을 입었다.[80]
3. 7. 성동(城東)회전(會戰)
기리노 도시아키는 1877년 4월 14일, 구마모토대 대대장 이케베 기치주로의 건의로 니혼기(二本木)에 있던 본진을 기야마(木山)로 이동했다. 사쓰마군 여러 부대가 구마모토성, 우에키에서 차례대로 철퇴해온 4월 17일, 기리노 측은 본진 기야마를 중심으로 우익에는 오즈, 나가미네(長嶺), 호타쿠보(保田窪), 겐군(健軍), 좌익에는 미후네에 걸쳐 20km 정도의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82]4월 19일, 구마모토 진다이, 별동 제2, 제5여단은 연계하여 겐군 지구의 노베오카(延岡) 부대를 공격했다. 같은 달 20일, 별동 제5여단 주력은 호타쿠보 지구의 사쓰마군을 공격했다. 나가미네 지구의 기지마는 발도대를 이끌고 전진, 별동 제5여단의 좌익을 돌파하여 구마모토성으로 돌입했다. 한편, 사쓰마군의 우익인 미후네에는 사카모토(坂元)가 지휘하는 여러 부대가 구마모토에 들어간 신정부군과 교대하는 형태로 진주해왔다. 양군의 충돌은 4월 19일과 20일에 신정부군이 사쓰마군에 공격을 시작하면서 구마모토 평야 지역으로 확대되었다.[82]
3. 8. 사쓰마군의 세 지역 반거책과 히토요시 공방전
4월 21일, 사쓰마군은 야베마치(矢部町)에서 군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무라타 신파치(村田新八)와 이케노우에(池上)는 대대 지휘관 직에서 물러나 본진에서 열리는 군의에 참여하기로 했다. 또한, 전군을 중대 단위로 편성하고, 사쓰마(薩摩), 오스미(大隅), 휴가(日向) 3개 주(州)에 걸쳐 방어 거점을 마련하며, 히토요시(人吉)를 그 중심지로 삼는다는 전략을 확정했다.[22]이에 따라 사쓰마군은 곧바로 시하라(椎原)를 넘어 히토요시 분지로 퇴각했다. 4월 27일, 히토요시 분지에 도착한 사쓰마군은 본진을 히토요시에 설치했다. 다음 날인 28일, 에시로(江代)에 도착한 기리노 도시아키(桐野利秋)는 이곳에 임시 본진을 설치하고 다시 군의를 열어 히토요시에 병원과 탄약 제조 시설을 설치하고, 각 방면에 부대를 배치하는 등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마련했다.[22]
이때, 기리노는 히토요시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양 날개를 펼치는 형태로 사쓰마군을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3. 8. 1. 간세(神瀨)방면
5월 8일, 헨미, 고노 슈이치로, 히라노, 후치베는 각자 4개 부대를 이끌고 간세(神瀬) 에비라세(箙瀬) 방면으로 향했다.[22] 신정부군과의 전투는 5월 9일에 시작되었지만, 15일에는 하치쿠 대(破竹隊)의 아카쓰카 겐타로(赤塚源太郎) 이하 1개 중대가 신정부군에 항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22]3. 8. 2. 마에(万江)방면
4월 21일, 사쓰마군은 야베하마정(矢部浜町)에서 군의를 열고, 전군을 중대 편제로 재편하고 히토요시(人吉)를 근거지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때 편성된 부대와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부대명 | 지휘관 |
---|---|
기병대 | 노무라 신스케(野村忍介) |
진무대(振武隊) | 나카지마 타케히코(中島健彦) |
행진대(行進隊) | 사가라 나가요시(相良長良) |
뢰격대(雷撃隊) | 헤나미 주로타(辺見十郎太) |
간성대(干城隊) | 아다 소고로(阿多壮五郎) |
상산대(常山隊) | 히라노 마사스케(平野正介) |
정의대(正義隊) | 고노 슈이치로(河野主一郎) |
붕익대(鵬翼隊) | 후치베 군페이(淵辺群平) |
용의대(勇義隊) | 나카야마 모리타카(中山盛高) |
이후 사쓰마군은 시이하라 고개(椎原越え)를 넘어 히토요시 분지(人吉盆地)로 후퇴했다. 4월 27일, 히토요시 분지에 진입한 사쓰마군은 히토요시에 본영을 설치하고, 28일에는 에다이(江代)에 출장 본영을 설치하여 병원과 탄약 제조소를 설치하는 등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5월 19일, 별동 제2여단(야마다 소장)은 히토요시로 통하는 길목인 만강(万江) 고개의 미즈나시(水無)·오가와치(大河内)의 사쓰마군을 공격했다. 사쓰마군의 상산대(常山隊) 7번 중대는 시카자와무라(鹿沢村)로 후퇴하여 반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다시 철수했다. 5월 28일, 정부군이 시카자와무라의 상산대 7번 중대를 공격했고, 상산대는 탄약 부족으로 우치야마다(内山田)를 거쳐 오무라(大村)로 후퇴하여 방어 시설을 강화했다.[22]
3. 8. 3. 오노(大野)방면
4월 21일, 사쓰마군은 야베하마정(矢部浜町)에서 군사 회의를 열고 무라타 신파치(村田新八)와 이케가미(池上)가 대대 지휘장에서 물러나 본영 소속으로 군사 회의에 참가하는 것, 전군을 중대 편제로 바꾸는 것, 사쓰마, 오스미, 히우가 3주에 근거지를 두는 것, 히토요시(人吉)를 근거지로 하는 것 등을 결정했다. 이때 결정된 각 부대 편성과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부대 | 지휘관 |
---|---|
기병대(奇兵隊) | 노무라 신스케(野村忍介) |
진무대(振武隊) | 나카지마 타케히코(中島健彦) |
행진대(行進隊) | 사가라 나가요시(相良長良) |
뢰격대(雷撃隊) | 헤나미 주로타(辺見十郎太) |
간성대(干城隊) | 아다 소고로(阿多壮五郎) |
상산대(常山隊) | 히라노 마사스케(平野正介) |
정의대(正義隊) | 고노 슈이치로(河野主一郎) |
붕익대(鵬翼隊) | 후치베 군페이(淵辺群平) |
용의대(勇義隊) | 나카야마 모리타카(中山盛高) |
이후 사쓰마군은 전군을 둘로 나누어 시이하라 고개(椎原越え)를 넘어 히토요시 분지(人吉盆地)로 후퇴했다.
4월 27일, 히토요시 분지에 진입한 사쓰마군은 본영을 히토요시에 두었다. 28일에 에다이(江代)에 도착한 기리노(桐野)는 출장 본영을 설치하고 군사 회의를 열었다. 에다이 군의(江代軍議)에서는 히토요시에 병원과 탄약 제조소를 설치하고, 각 방면에 부대를 배치하는 것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기리노는 히토요시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양익을 펼치는 형태로 사쓰마군을 다음과 같이 배치했다.[22]
방면 | 지휘관 |
---|---|
분고구(豊後口) 방면 | 노무라 신스케(野村忍介) |
가고시마(鹿児島) 방면 | 나카지마 타케히코(中島健彦) |
동상(同上) | 사가라 나가요시(相良長良) |
오구치(大口) 방면 | 헤나미 주로타(辺見十郎太) |
에다이구치(江代口) 방면 | 아다 소고로(阿多壮五郎) |
나카무라(中村)·가쿠토(加久藤)·아야(綾) 방면 | 히라노 마사스케(平野正介) |
칸세(神瀬)·고바야시(小林) 방면 | 고노 슈이치로(河野主一郎) |
사시키(佐敷) 방면 | 후치베 군페이(淵辺群平) |
카와우치(川内) 방면 | 나카야마 모리타카(中山盛高) |
고원구(高原口) 방면 | 호리 요하치로(堀与八郎) |
5월 5일, 다노우라(田ノ浦)에 정벌군이 상륙했다. 재키무라(材木村)는 다노우라에서 히토요시로 통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붕익대 4, 6번 중대는 재키무라에 감시병을 배치하고 오오노(大野) 방면을 수비했다. 5월 6일, 정벌군이 재키무라의 붕익대 4번 중대를 공격하자, 사쓰마군은 이를 맞아 싸워 일단 사시키(佐敷)로 후퇴시켰다. 그러나 5월 9일, 정벌군은 다시 재키무라의 붕익대 6번 중대를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사쓰마군은 패하여 나가조노무라(長園村)로 후퇴했다. 이때 후치베(淵辺)가 본영에서 간성대 8번 중대 좌반대를 지원군으로 보내 정벌군을 포위 공격하여 혼란에 빠뜨리고 요새를 되찾았다. 이치노세(一ノ瀬)의 붕익대 3번 중대는 정벌군의 공격에 고전하면서도 재키무라에 도착하여 요새 탈환에 성공했다. 붕익대 2, 5번 중대, 간성대 4번 중대 등은 사시키 방면 유노우라(湯ノ浦)의 정벌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오오노로 후퇴했다. 5월 16일, 정벌군이 이치노세의 붕익대 5번 중대를 공격했다. 사쓰마군은 고전했으나, 오오노에서 온 간성대 3번 중대의 참전으로 정벌군을 물리쳤다.
5월 20일, 별동 제3여단이 구기노(久木野)(구마모토현 아소군)에 진입했다. 오오노 본영에 있던 후치베는 간성대 3, 4, 8번 중대에 명령하여 구기노의 정벌군을 공격하여 후퇴시켰다. 이 전투는 사쓰마군의 대승으로, 총기와 탄약 등을 많이 획득했다. 5월 22일, 후치베는 사시키구치(佐敷口)의 유노우라로 진격하기로 결정하고, 간성대 3, 4번 중대, 붕익대 6번 중대 등에 진군을 명령했다. 이날 오오노 본영에 있던 헨미(辺見)는 구기노로 진격하기로 결정하고 후치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후치베는 간성대 8번 중대를 구기노로 보냈다. 거기서 오오노구치(大野口)에서 유노우라로 진격 중이던 간성대 3, 4번 중대와 합류하여 정벌군을 물리쳤다. 5월 23일, 별동 제3여단이 쿠라타니(倉谷), 타카히라(高平), 오오노 방면의 사쓰마군을 잇달아 격파하고 오오노에 진입했다. 붕익대 5번 중대 좌소대, 간성대 2번 중대는 방어했으나 패하여 이시가와치(石河内)로 후퇴했다. 구기노에 있던 간성대 8번 중대도 참전하려 했으나, 오오노의 요새는 정벌군에게 함락되었다. 후치베 군페이(淵辺群平)는 요새를 탈환하기 위해 야습을 명령했으나, 정벌군의 반격으로 후퇴했다. 이날 이치노세의 붕익대 3번 중대의 요새에도 관군이 습격했다. 3번 중대는 오오노구치의 패전 소식을 듣고, 좌소대는 카마세(鎌瀬), 우소대는 우에즈게(植柘)로 나누어 후퇴했다. 이후 가미노세(神ノ瀬) 방면도 패했다는 보고를 듣고, 마이도코(舞床)로 후퇴했다. 붕익대 2번 중대는 이와타나(岩棚)에서 고가쿠도(程角道) 미카타사카이(三方堺)로 후퇴했다.
5월 28일 새벽, 정벌군이 마이도코의 붕익대 3번 중대를 습격했다. 이날은 방어에 성공했으나, 정벌군은 5월 29일에 다시 붕익대 3번 중대 우반대를 공격했다. 사쓰마군은 요새를 버리고 후퇴했으나, 붕익대 3번 중대 좌소대의 활약으로 요새를 되찾고, 총기와 탄약을 얻었다. 이날 밤, 미카타사카이의 붕익대 2번 중대도 습격을 받아, 탄약 부족으로 후퇴했다. 이 때문에 마이도코의 사쓰마군은 효요고에(鵯越)로 후퇴했다. 삿쇼(札松) 방면의 붕익대 2번 중대가 히토요시로 후퇴했기 때문에, 신무대(振武隊) 2번 중대, 간성대 8번 중대는 고가쿠고에(程角越) 지원을 위해 진격했고, 신무대 2번 중대는 고가쿠 본도(程角本道)의 수비를 시작했다. 붕익대 2번 중대도 고가쿠고에로 진격했다. 5월 30일 새벽 무렵, 정벌군이 고가쿠 좌익의 요새를 공격하여 사쓰마군은 패배했다. 정벌군은 기세를 몰아 간성대 8번 중대, 신무대 16번 소대를 공격했다. 사쓰마군 각 부대는 크게 고전하여, 잇달아 병사들을 하라다무라(原田村)로 철수시켰다.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고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채 밤이 되었다. 다음날 사쓰마군 각 부대는 하라다무라에 병사들을 배치했다.
6월 1일 새벽, 여러 길의 정벌군이 히토요시를 향해 진격했다. 여러 방면의 사쓰마군은 모두 패하여 히토요시와 오오하타(大畑)로 후퇴했다. 이를 알게 된 추진무라(中神村)의 붕익대 6번 중대, 뢰격대(雷撃隊) 5번 중대, 파죽대(破竹隊) 1번 중대, 기타 2개 대, 효요고에의 붕익대 3번 중대, 토노하라(戸ノ原)의 붕익대 5번 중대 등 여러 부대는 오오하타로 후퇴했다. 하라다무라의 간성대 8번 중대, 신무대 2번 중대, 붕익대 2번 중대, 신무대 16번 소대, 고우노하라(郷之原)의 파죽대 4번 중대, 후카가미(深上)의 뢰격대 1번 중대, 바바무라(馬場村)의 뢰격대 2번 중대 등은 히토요시의 위기를 듣고, 싸우면서 히토요시로 향했다.
3. 8. 4. 히토요시 공방전
히토요시(人吉)는 세이난 전쟁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1877년 4월 21일,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가 이끄는 사쓰마군(薩軍)은 군의(軍議)를 통해 전군(全軍)을 중대(中隊) 편제로 재편하고, 히토요시를 근거지로 삼기로 결정했다.[22]이후 사쓰마군은 시이하라 고개(椎原越え)를 넘어 히토요시 분지(人吉盆地)로 후퇴했고, 4월 27일 히토요시에 본영을 설치했다. 기리노 도시아키(桐野利秋)는 에다이(江代)에 출장 본영을 설치하고 군의를 열어 병원과 탄약 제조소 설치, 각 방면에 부대 배치를 결정했다.[22]
사쓰마군은 히토요시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양익을 펼치는 형태로 배치되었다. 주요 배치 현황은 다음과 같다.[22]
방면 | 지휘관 |
---|---|
분고구(豊後口) | 노무라 오시노스케(野村忍介) |
가고시마(鹿児島) | 나카지마 다케히코(中島健彦) |
동상(同上) | 사가라 나가쓰나(相良長良) |
오구치(大口) | 헨미 주로타(辺見十郎太) |
에다이구치(江代口) | 아다 소고로(阿多壮五郎) |
나카무라(中村)·가쿠토(加久藤)·아야(綾) | 히라노 마사스케(平野正介) |
간세(神瀬)·고바야시(小林) | 고노 슈이치로(河野主一郎) |
사시키(佐敷) | 후치베 군페이(淵辺群平) |
가와우치(川内) | 나카야마 모리타카(中山盛高) |
고원구(高原口) | 호리 요하치로(堀与八郎) |
이에 맞서는 관군(官軍)은 다음과 같이 배치되었다.
방면 | 부대 (지휘관) |
---|---|
겐군(健軍)·기야마(木山) | 제1여단 (노즈 시즈오 소장) |
사토리(砂取)·가와지리(川尻) | 제2여단 (미요시 시게오미 소장) |
다카모리(高森) | 제3여단 (미우라 고로 소장) |
가고시마(鹿児島) | 제4여단 (소가 스케노리 소장) |
동상(同上) | 별동 제1여단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소장) |
미나미타네야마(南種山)·고카쇼(五箇庄) | 별동 제2여단 (야마다 아키요시 소장) |
사시키(佐敷)·미즈마타(水俣)·오구치(大口) | 별동 제3여단 (가와지 도시요시 소장) |
히나쿠(比奈久)·구마가와구치(球磨川口) | 별동 제4여단 (오야마 이와오 소장) |
야베하마정(矢部浜町) | 구마모토 진대 (다니 다테키 소장) |
5월부터 6월까지 신세(神瀬) 주변에서 양군의 공방전이 벌어졌지만, 사쓰마군 내에서 배신자가 발생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5월 19일, 별동 제2여단은 미즈나시(水無)·오가와치(大河内)의 사쓰마군을 공격했고, 이후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이어졌다.
5월 5일, 다노우라(田ノ浦)에 상륙한 정부군은 사쓰마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사쓰마군은 고전 끝에 후퇴했다. 5월 20일, 별동 제3여단이 구기노(久木野)에 진입하자, 사쓰마군은 반격하여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5월 23일, 정부군은 오오노(大野)를 점령했고, 사쓰마군은 각 방면에서 패퇴를 거듭했다.
6월 1일, 정부군은 히토요시를 향해 총공격을 시작했고, 사쓰마군은 각 방면에서 패퇴하며 히토요시와 오하타(大畑)로 후퇴했다.
한편, 이 전쟁 중에 다수의 부상자를 구호하기 위해 박애사(일본적십자사의 전신)가 설립되었다. 앰뷸런스(救急馬車)도 준비되었으며,[83] 각지에서 관군 종군 지원자가 도착하는 등 전시 체제가 정비되어 갔다.[84]
3. 9. 오구치(大口)방면 전투
1877년 4월 27일, 히토요시 분지(人吉盆地)에 진입한 사쓰마군은 본영을 히토요시에 두었다. 4월 28일에 에다이(江代)에 도착한 키리노 도시아키(桐野)는 이곳에 출장 본영을 설치하고 군의(軍議)를 열었다. 에다이 군의(江代軍議)에서는 히토요시(人吉)에 병원과 탄약 제조소를 설치하고, 각 방면에 부대를 배치하는 것 등이 결정되었으며, 순차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이때, 기리노(桐野)는 히토요시(人吉)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양익을 펼치는 형태로 사쓰마군(薩軍)을 다음과 같이 배치했다.[22]방면 | 지휘관 |
---|---|
분고구(豊後口) 방면 | 노무라 신스케(野村忍介) |
가고시마(鹿児島) 방면 | 나카지마 타케히코(中島健彦) |
동상(同上) | 사가라 나가요시(相良長良) |
오구치(大口) 방면 | 헤나미 주로타(辺見十郎太) |
에다이구치(江代口) 방면 | 아다 소고로(阿多壮五郎) |
나카무라(中村)·가쿠토(加久藤)·아야(綾) 방면 | 히라노 마사스케(平野正介) |
칸세(神瀬)·고바야시(小林) 방면 | 고노 슈이치로(河野主一郎) |
사시키(佐敷) 방면 | 후치베 군페이(淵辺群平) |
카와우치(川内) 방면 | 나카야마 모리타카(中山盛高) |
고원구(高原口) 방면 | 호리 요하치로(堀与八郎) |
3. 10. 가고시마 방면의 전투
메이지 정부는 규슈에서 여러 사무라이 반란을 진압한 경험이 있어, 1876년 12월, 경찰관 나카하라 히사오 외 57명을 파견하여 사이고 암살을 포함한 여러 정보를 수집하게 했다. 이들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사이고 암살을 위해 파견되었다고 자백했으나, 나중에 번복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쓰마에서 널리 믿어져 반란의 명분이 되었다.[3]
1877년 1월 30일, 메이지 정부는 가고시마에 군함을 보내 무기를 압수하려 했다. 이와 함께 1877년 사무라이 쌀 봉록 폐지로 인해 갈등이 커졌다. 사이고의 사관학교 학생 50명이 소무타 병기고를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고, 사흘 동안 1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해군 조선소와 다른 병기고를 습격했다.[3] 사이고는 이 상황에 당황했지만, 결국 반란을 이끌게 되었다.
2월, 정부는 내무성 관리 하야시 도모유키와 가와무라 스미요시 제독을 ''다카오''호에 태워 상황 파악을 위해 파견했다. 사쓰마 번 지사 오야마 쓰나요시는 봉기가 사이고 암살 시도에 대한 대응이며, 가와무라 제독(사이고의 사촌)이 상륙하여 상황을 진정시킬 것을 요청했다. 오야마가 떠난 후, 무장한 남자들이 ''다카오''호에 승선하려 했으나 격퇴되었다.[3]
다음 날, 하야시는 오야마에게 가와무라를 상륙시킬 수 없으며, ''다카오''호 공격은 대역죄라고 선언했다. 2월 12일 고베로 돌아온 하야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장군과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반란 확산을 막기 위해 일본 제국 육군을 가고시마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 사이고는 부관 키리노 도시아키와 시노하라 쿠니모토를 만나 도쿄로 진군할 의사를 밝혔다. 다수의 자원병을 거절하고 다른 번의 지원도 요청하지 않았으며, 가고시마에 병력을 남겨두지 않았다. 사이고는 군복을 입어 합법성을 높였다. 북쪽으로 진군하는 군대는 악천후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는 9년 전 메이지 유신을 꾀했던 사람들과 유사하여 신의 가호로 해석되기도 했다.[3]
2월 말, 정부는 가고시마의 민심을 수습하고 사쓰마군의 본거지를 공격하기 위해 시마즈 히사미쓰에게 원로원 의관 야나기하라 사키미쓰를 칙사로 파견했다. 3월 7일에 가고시마에 도착했지만, 히사미쓰는 사쓰마군을 지원하지 않았다. 칙사들은 나카하라 등을 석방시키고, 탄약 제작소와 포대를 파괴하고, 화약과 탄약을 몰수하여 철수했다.[86] 이로 인해 사쓰마군은 이후 전투에 큰 차질을 빚게 된다.
구마모토성 포위가 해제된 4월 23일, 정부는 가와무라 준기 해군중장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육해군 혼성군을 가고시마에 파병했으나, 증원을 요청했다. 가와무라 참군은 시민 생활 안정을 위해 닌레이 게이쓰 대좌를 임시 현령으로 삼아 경찰 업무를 대행하게 했다. 5월 3일, 신임 현령 이와무라 미치토시가 부임하여 사이고에게 고유서를 보냈다.
4월 21일, 사쓰마군은 야베하마정(矢部浜町)에서 군의를 열고 히토요시(人吉)를 근거지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후 히토요시 분지(人吉盆地)로 후퇴, 4월 27일 본영을 히토요시에 두었다. 5월, 헨미(辺見), 고노 슈이치로(河野主一郎), 히라노(平野), 후치베(淵辺)는 각각 부대를 이끌고 신세(神瀬)·후세(箙瀬) 방면으로 향했다.
별동 제2여단은 7개의 길에서 구마 분지를 공격하는 작전을 세우고, 5월 1일부터 9일까지 수행하였다. 이 무렵 기리노는 미야자키에 군무소를 설치하고, 5월 29일 사이고를 미야자키로 이동시켰다. 5월 31일, 사이고가 도착하자 이곳이 새로운 삿슈군의 본영이 되었다.
6월 1일 새벽, 정토군이 히토요시에 돌입하였다. 삿슈군 본대는 오오하타 등에서 오오구치 방면의 라이게키대와 협력하여 전선을 구축했으나 실패하고, 호리키리 고개를 넘어 이이노로 후퇴하였다.
4월 22일, 헨미(辺見)는 뇌격대(雷撃隊) 지휘관으로 오구(大口) 방어에 파견되었다. 정벌군은 5월 4일, 제3여단(別働第3旅団)을 파견했다. 헨미(辺見)는 5월 8일 쿠기노(久木野) 본도(本道)에 공격을 가해 정벌군을 격퇴시켰다.
정벌군은 5월 23일, 야하즈다케로 진격했고, 5월 26일 새벽, 사사 토모후사 등의 공격대가 야하즈다케의 관군을 기습했지만 실패했다.
6월 1일, 히토요시가 함락되고, 6월 3일, 관군의 오오세키산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6월 17일, 정벌군은 하치노헤(八代)에서 작전 회의를 열었다. 6월 18일, 헨미(辺見)는 정벌군을 저지했지만 패배했다. 6월 20일, 오구가 함락되었다. 헨미(辺見)는 “사립학교의 정예병을 이끌고도, 아직 남아 있었다면, 어찌 이런 패배를 당했겠는가”[85]라고 한탄했다. 6월 25일, 뇌격대는 남쪽으로 후퇴하며 2개월간의 오구 방면 전투가 끝났다.
3. 10. 1. 성산, 시게토미(重富), 무라사키바루(紫原) 전투
4월 21일, 사쓰마군은 야베하마정(矢部浜町)에서 군의를 열고, 전군을 중대 편제로 재편하고 히토요시(人吉)를 근거지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후 사쓰마군은 시이하라 고개(椎原越え)를 넘어 히토요시 분지(人吉盆地)로 후퇴, 4월 27일 본영을 히토요시에 두었다. 기리노(桐野)는 에다이(江代)에 출장 본영을 설치하고 군의를 열어 병원과 탄약 제조소 설치, 각 방면에 부대 배치를 결정했다.이때 기리노는 히토요시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양익을 펼치는 형태로 사쓰마군을 배치했다.
방면 | 지휘관 |
---|---|
분고구(豊後口) | 노무라 신스케(野村忍介) |
가고시마(鹿児島) | 나카지마 타케히코(中島健彦) |
동상(同上) | 사가라 나가요시(相良長良) |
오구치(大口) | 헤나미 주로타(辺見十郎太) |
에다이구치(江代口) | 아다 소고로(阿多壮五郎) |
나카무라(中村)·가쿠토(加久藤)·아야(綾) | 히라노 마사스케(平野正介) |
칸세(神瀬)·고바야시(小林) | 고노 슈이치로(河野主一郎) |
사시키(佐敷) | 후치베 군페이(淵辺群平) |
카와우치(川内) | 나카야마 모리타카(中山盛高) |
고원구(高原口) | 호리 요하치로(堀与八郎) |
이에 대한 관군(官軍)의 여단 배치는 다음과 같았다.
- 관군 여단 배치
방면 | 지휘관 |
---|---|
켄군(健軍)·키야마(木山) | 제1여단(野津鎮雄 소장) |
사토리(砂取)·카와지리(川尻) | 제2여단(三好重臣 소장) |
다카모리(高森) | 제3여단(三浦梧楼 소장) |
가고시마(鹿児島) | 제4여단(소가 유준(曾我祐準) 소장) |
동상(同上) | 별동 제1여단(高島鞆之助 소장) |
미나미타네야마(南種山)·고카쇼(五箇庄) | 별동 제2여단(山田顕義 소장) |
사시키(佐敷)·미즈마타(水俣)·오구치(大口) | 별동 제3여단(川路利良 소장) |
히나쿠(比奈久)·쿠마가와구치(球磨川口) | 별동 제4여단(大山巌 소장) |
야베하마정(矢部浜町) | 구마모토 진대(타니 간죠(谷干城) 소장) |
5월, 헨미(辺見), 고노 슈이치로(河野主一郎), 히라노(平野), 후치베(淵辺)는 각각 부대를 이끌고 신세(神瀬)·후세(箙瀬) 방면으로 향했다. 정벌군(征討軍)과의 전투는 5월 9일에 시작되었지만, 5월 15일에는 파죽대(破竹隊)의 아카츠카 겐타로(赤塚源太郎) 이하 1개 중대가 정벌군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신세(神瀬) 주변에서 양군의 공방은 6월경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별동 제2여단(야마다 소장)은 5월 19일, 미즈나시(水無)·오가와치(大河内)의 사군(薩軍)을 공격했고, 조산대(常山隊) 7번 중대는 5월 21일 미즈나시·오가와치의 정벌군에 반격했으나,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고 다시 시카자와무라(鹿沢村)로 철수했다. 5월 28일, 정벌군은 시카자와무라의 조산대 7번 중대를 공격했고, 조산대는 탄약이 떨어져 우치야마다(内山田)로 후퇴하고, 다음 날 5월 29일 오무라(大村)에 방어 시설을 강화했다.
5월 5일, 다노우라(田ノ浦)에 정벌군이 상륙했다. 붕익대(鵬翼隊)는 재키무라(材木村)에 감시병을 배치하고 오오노(大野) 방면을 수비했다. 5월 6일, 정벌군은 재키무라의 붕익대 4번 중대를 공격하여 사쓰마군(薩軍)은 일단 사시키(佐敷)로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5월 9일, 정벌군은 다시 재키무라의 붕익대 6번 중대를 공격했고, 치열한 전투 끝에 사쓰마군은 패하여 나가조노무라(長園村)로 후퇴했다. 후치베(淵辺)가 지원군으로 간성대(干城隊) 8번 중대 좌반대를 보냈기에, 정벌군을 포위 협격하여 혼란에 빠뜨리고, 요새를 되찾았다. 또한, 이치노세(一ノ瀬)의 붕익대 3번 중대는 정벌군의 공격에 고전하면서도 재키무라에 도착하여, 재키무라의 사쓰마군과 함께 요새 탈환에 성공했다. 붕익대 2, 5번 중대, 간성대 4번 중대, 기타 여러 부대는 사시키 방면 유노우라(湯ノ浦)의 정벌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오오노로 후퇴했다. 5월 16일, 정벌군이 이치노세의 붕익대 5번 중대를 공격했고, 사쓰마군은 고전했으나, 오오노에서 온 간성대 3번 중대의 참전으로 정벌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5월 20일, 별동 제3여단이 구기노(久木野)(구마모토현 아소군)에 진입했다. 후치베는 간성대 3, 4, 8번 중대에 명령하여 구기노의 정벌군을 공격하여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는 사쓰마군의 대승으로, 총기와 탄약, 기타 물품을 많이 획득했다. 5월 22일, 후치베는 사시키구치(佐敷口)의 유노우라로 진격하기로 결정하고, 간성대 3, 4번 중대, 붕익대 6번 중대, 기타 2개 대에 진군을 명령했다. 또한 이날 오오노 본영에 있던 헨미(辺見)는 구기노로 진격하기로 결정하고 후치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후치베는 간성대 8번 중대를 구기노로 보냈다. 거기서 마침 오오노구치(大野口)에서 유노우라로 진격 중이던 간성대 3, 4번 중대와 합류하여 정벌군을 물리쳤다. 5월 23일, 별동 제3여단이 쿠라타니(倉谷), 타카히라(高平), 오오노 방면의 사쓰마군을 잇달아 격파하고 오오노에 진입했다. 붕익대 5번 중대 좌소대, 간성대 2번 중대는 방어했으나 패하여 이시가와치(石河内)로 후퇴했다. 후치베 군페이(淵辺群平)는 요새를 탈환하기 위해 야습을 명령했으나, 정벌군의 반격으로 후퇴했다. 이날 이치노세의 붕익대 3번 중대의 요새에도 관군이 습격했고, 3번 중대는 오오노구치의 패전 소식을 듣고, 좌소대는 카마세(鎌瀬), 우소대는 우에즈게(植柘)로 나누어 후퇴했다. 이후 가미노세(神ノ瀬) 방면도 패했다는 보고를 듣고, 마이도코(舞床)로 후퇴했다. 붕익대 2번 중대는 이와타나(岩棚)에서 고가쿠도(程角道) 미카타사카이(三方堺)로 후퇴했다.
5월 28일 새벽, 정벌군이 마이도코의 붕익대 3번 중대를 습격했다. 이날은 방어에 성공했으나, 정벌군은 5월 29일에 다시 붕익대 3번 중대 우반대를 공격했다. 사쓰마군은 요새를 버리고 후퇴했으나, 붕익대 3번 중대 좌소대의 활약으로 요새를 되찾고, 총기와 탄약을 얻었다. 이날 밤, 미카타사카이의 붕익대 2번 중대도 습격을 받아, 탄약 부족으로 후퇴했다. 이 때문에 마이도코의 사쓰마군은 효요고에(鵯越)로 후퇴했다. 삿쇼(札松) 방면의 붕익대 2번 중대가 히토요시로 후퇴했기 때문에, 신무대(振武隊) 2번 중대, 간성대 8번 중대는 고가쿠고에(程角越) 지원을 위해 진격했고, 신무대 2번 중대는 고가쿠 본도(程角本道)의 수비를 시작했다. 붕익대 2번 중대도 고가쿠고에로 진격했다. 5월 30일 새벽 무렵, 정벌군이 고가쿠 좌익의 요새를 공격하여 사쓰마군은 패배했다. 정벌군은 기세를 몰아 간성대 8번 중대, 신무대 16번 소대를 공격했다. 사쓰마군 각 부대는 크게 고전하여, 잇달아 병사들을 하라다무라(原田村)로 철수시켰다.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고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채 밤이 되었다. 다음날 사쓰마군 각 부대는 하라다무라에 병사들을 배치했다.
6월 1일 새벽, 여러 길의 정벌군이 히토요시를 향해 진격했다. 여러 방면의 사쓰마군은 모두 패하여 히토요시와 오오하타(大畑)로 후퇴했다. 이를 알게 된 추진무라(中神村)의 붕익대 6번 중대, 뢰격대(雷撃隊) 5번 중대, 파죽대(破竹隊) 1번 중대, 기타 2개 대, 효요고에의 붕익대 3번 중대, 토노하라(戸ノ原)의 붕익대 5번 중대 등 여러 부대는 오오하타로 후퇴했다. 하라다무라의 간성대 8번 중대, 신무대 2번 중대, 붕익대 2번 중대, 신무대 16번 소대, 고우노하라(郷之原)의 파죽대 4번 중대, 후카가미(深上)의 뢰격대 1번 중대, 바바무라(馬場村)의 뢰격대 2번 중대 등은 히토요시의 위기를 듣고, 싸우면서 히토요시로 향했다.
이 전쟁 중 5월, 다수의 부상자를 구호하기 위해 박애사 (일본적십자사의 전신)가 설립되었다. 사상병을 옮기기 위한 앰뷸런스(救急馬車)도 준비되었다.[83] 6월부터는 아오모리현에서 62명, 이시카와현에서 35명 등 관군에 종군한 지원자가 속속 도착했다.[84]
4월 30일, 상산대 3번 중대는 나카무라, 유격대 6번 소대 하루타 기치지는 아타마하루 등 각각 요지를 방비하였으나, 5월 3일부터 7일까지의 미야후지 전투, 10일부터 14일까지의 히라세 전투에서 정토군은 나카무라 중좌의 활약으로 이들을 패주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나카무라 중좌는 5월 21일, 요코노 방면의 삿슈군을 습격하여 이와노무라로 패주시켰다. 한편, 오야에를 지키고 있던 간죠대 2번 중대는 이와노무라를 방비하고, 5월 22일, 정면의 정토군을 습격하여 패주시켰다. 더욱 추격하려 하였으나 탄약 부족으로 미요라의 니시야에로 후퇴하였다.
별동 제2여단은 7개의 길에서 구마 분지를 공격하는 작전을 세우고, 5월 1일부터 9일까지 이 작전을 수행하였다. 먼저 선봉대는 구마가와 북안을 따라가는 구마가와 길, 남안을 따라가는 사시키 길에서 공격하였으나, 길이 대부대가 통과하기에는 어려운 지형이었기에 관군은 각지에서 삿슈군에게 패퇴하였다. 그러나, 인원·물자 부족으로 삿슈군은 초기의 기세가 꺾였다. 그 틈을 타 5월 12일, 별동 제2여단은 구마 분지 북부에 있는 고카쇼 길 등 5개의 길에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삿슈군의 구마가와 북부 방어가 허술하였기에, 별동 제2여단은 5월 12일부터 25일까지 13일간 고카쇼 길의 아타마하루·타케노하라, 구마가와 길의 신세, 타네야마 길, 아오가사산 등 많은 요지를 함락시켰다.
이 무렵 기리노는 미야자키에서 가고시마 방면 및 분고 등의 군을 통감하고 있었으나, 이곳을 근거지로 삼기 위해 미야자키 지청을 점령하고, 5월 28일에 군무소로 개칭하였다. 별동 제2여단의 침공으로 위험이 눈앞에 다가온 히토요시에서는, 무라타 신파치 등이 상의하여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5월 29일 이케가미를 수행시켜 저격대 등 2,000명의 호위를 받쳐 사이고를 미야자키의 군무소로 이동시켰다. 5월 31일에 사이고가 군무소에 도착하자, 이곳이 새로운 삿슈군의 본영이 되고, 군표(사이고 삿슈) 등이 만들어져 재정의 재건이 도모되었다.
야마다 소장이 지휘하는 별동 제2여단의 주력 부대는 5월 30일, 고카쇼 길·쇼가쿠 길 등에서 히토요시를 향해 진격하였다. 이와 싸운 삿슈군은 각지에서 패퇴하고, 고카쇼 길의 요지인 에다이도 함락되었다. 또 신세구치의 고노 슈이치로, 오오노구치의 후치베는 모두 히토요시에 있었으나, 삿슈군이 패배하고 히토요시가 위기에 처한 것을 듣고, 구마가와에 걸린 호오쿄우바시를 향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기세는 멈출 수 없었고, 다리를 불태워 이를 막으려 한 후치베는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고 요시다로 후송되었으나 사망하였다.
6월 1일 새벽, 쇼가쿠 길의 산지 중좌대에 이어 정토군이 잇따라 히토요시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무라야마 대지에 포대를 설치하고, 삿슈군 본영이 있던 구마가와 남부를 포격하였다. 이에 대해 무라타 신파치가 이끄는 삿슈군도 히토요시성 이노마루에 포대 진지를 설치하여 대항하였다. 그러나 삿슈군의 대포는 사정거리가 짧아 적합하지 않았고, 오히려 에이코쿠지와 히토요시성의 성하마을을 불태워 버렸다. 이 전투는 사흘간 계속되었다. 삿슈군 본대는 오오하타 등에서 오오구치 방면의 라이게키대와 협력하여 전선을 구축하고, 정토군의 더욱 남하를 막으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호리키리 고개를 넘어 이이노로 후퇴하였다. 이렇게 히토요시는 정토군의 점령지가 되었다.
6월 4일이 되자, 삿슈군 히토요시대 대장 이누도 하루나리 등이 부하와 함께 별동 제2여단 본부에 항복하였고, 그 후에도 본대에 남은 부대가 정토군의 권고를 받아들여 잇따라 항복하였다. 히토요시대에는 나중에 정토군에 채용되어 군무에 종사한 자도 있었다.
4월 22일, 13개 중대(약 1300명)의 뇌격대(雷撃隊) 지휘관으로 발탁된 헨미(辺見)는 곧바로 오구(大口) 방어에 파견되었다. 이에 맞서 정벌군(征討軍)은 5월 4일, 제3여단(別働第3旅団)의 3개 대대를 미나마타(水俣)에서 오구 공략을 위해 파견했다. 이 부대는 도중, 오가와치(小河内), 야마노(山野) 등에서 소수의 사쓰마군(薩軍)을 격퇴시키면서 오구 북서쪽 야마노까지 진격했다.
헨미(辺見)는 정벌군을 격퇴하기 위해 오구의 뇌격대를 배치했다. 5월 5일, 뇌격대와 정벌군은 우시오가와(牛尾川) 부근에서 교전했지만, 뇌격대는 패배하고 정벌군은 오구로 다가왔다. 헨미(辺見)는 뇌격대를 중심으로 정의대(正義隊), 간죠대(干城隊), 구마모토대(熊本隊), 협동대(協同隊) 등 여러 부대를 더하여 오츠카(大塚) 부근으로 진군하여 5월 8일 아침부터 쿠기노(久木野) 본도(本道)에 대거 공격을 가해 정벌군을 격퇴시켰고, 정벌군은 후카와타세(深渡瀬)까지 후퇴했다.
쿠기노와 야마노를 손에 넣은 헨미(辺見)는 5월 9일, 직접 부대를 이끌고 정벌군에 강력한 공격을 가해 격퇴시키고, 히사쓰(肥薩) 경계를 넘어 추격했다. 5월 11일, 뇌격대는 미나마타(水俣市) 근처까지 병력을 진격시켜, 오오세키산(大関山)에서 쿠기노에 진을 쳤다. 히토요시(人吉) 방어를 위해 구마가와(球磨川) 부근에 진을 치고 있던 후치베(淵辺)가 이끄는 봉익대(鵬翼隊) 6개 중대(약 600명)도 아시키타정(芦北町)(사시키(佐敷))을 공격했다. 또한 이케베(池辺)가 이끄는 구마모토대(熊本隊)(약 1500명)도 야하즈다케(矢筈岳)(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가고시마현 이즈미시)와 오니다케(鬼岳)에 배치되어 이즈미(出水), 미나마타로 진군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5월 12일, 봉익대는 사시키에서 패배했지만, 뇌격대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정벌군과 대등하게 맞서 싸워 “제2의 다하라자카·요시지토게 전투”라고 불릴 정도의 선전을 펼쳤다. 이를 본 정벌군은 증원을 결정하고, 제3여단을 사시키로, 제2여단을 미나마타로 파견했다.
정벌군은 5월 23일, 야하즈다케로 진격하여 압도적인 물량과 병력으로 사쓰마군을 공격했다. 구마모토대는 선전했지만, 버티지 못하고 후퇴했다. 반대로 5월 26일 새벽, 사사 토모후사, 후카노 카즈미 등이 지휘하는 약 60명의 공격대가 야하즈다케의 관군을 기습했지만, 정벌군의 총격 앞에 후퇴했고, 구마모토대는 어쩔 수 없이 오구로 후퇴했다.
6월 1일, 산슈(三洲) 점령의 근거지였던 히토요시가 함락되고, 사쓰마군 본대는 오바타(大畑)로 후퇴했다. 6월 3일, 관군의 두 방면에서 오오세키산으로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관군의 정면 부대는 원시림에 방화하면서 진격했다. 구마가와 방면에서는 별동대가 공격했다. 뇌격대는 이들을 격렬하게 요격했지만, 양면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오구 방면으로 후퇴했다. 이를 추격하여 관군은 쿠기노 전선의 여러 곳과 오오세키산, 구니미산(国見山)을 점령했다.
6월 7일, 쿠기노가 함락되고, 사쓰마군은 오가와치 방면으로 후퇴했다. 다음 날, 정벌군은 이를 추격하여 오가와치를 점령했다. 6월 13일, 야마노가 함락되었다. 정벌군은 오구로 다가왔고, 히토요시를 점령한 별동 제2여단은 이이노(飯野), 가쿠토(加久藤), 요시다고에(吉田越) 지역 진출을 위해 오바타의 사쓰마군 본대에 공격을 가했다. 결과적으로 뇌격대와 사쓰마군 본대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정벌군은 6월 17일, 하치노헤(八代)에서 오구 방면에 대한 작전 회의를 열고, 별동 제2여단은 고바야시(小林) 공략과 오구 방면에서의 정벌군 지원, 별동 제3여단은 오구 공략 후 남쪽의 카와우치(川内), 미야노조(宮之城), 쿠리노(栗野), 요코가와(横川) 방면을 공략한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이로써 뇌격대는 관군의 전략적 위협 범주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
6월 18일, 정벌군의 야마노 진격에 대해 헨미(辺見)가 이끄는 뇌격대는 포탄의 비 속에서 필사적으로 정벌군을 저지했다. 그러나 북동쪽 히토요시에서 온 별동 제2여단의 공격, 북서쪽 야마노에서 온 별동 제3여단의 공격으로 군산(郡山), 보주이시산(坊主石山)이 별동 제2여단의 손에 넘어갔다. 결과적으로 양자 사이에 있는 타카쿠마산(高熊山)에 틀어박혀 있던 구마모토대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정벌군은 6월 20일, 타카쿠마산의 구마모토대와 뇌격대가 점령하고 있는 오구를 공격했다. 이때의 전투에서는 참호를 중심으로 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히토요시, 군산, 보주이시산에서의 삼방 공격 속에서, 잡다한 병사들의 사기 저하와 적군의 압도적인 물량으로 인해, 헨미(辺見) 지휘하의 부대조차도 패배하고 결국 오구는 함락되었다. 뇌격대가 오구에서 철수하게 되었을 때, 헨미(辺見)는 사당의 노송나무 옆에 서서 억지로 눈물을 흘리며 “사립학교의 정예병을 이끌고도, 아직 남아 있었다면, 어찌 이런 패배를 당했겠는가”[85]라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유명한 “쥬로타(十郎太)의 눈물 소나무”의 유래가 되었다.
6월 25일, 뇌격대는 오구 남쪽에 진을 치고, 소기(曽木), 히시카리(菱刈)에서 관군과 싸웠지만, 돌이킬 수 없이, 사라(相良)가 이끄는 행진대(行進隊)와 나카지마(中島)가 이끄는 신무대(振武隊)와 합류하여 남쪽으로 후퇴했다. 여기서 약 2개월간의 오구 방면 전투에 막이 내렸다.
2월 말, 정부는 가고시마의 민심을 수습하고, 사쓰마군의 본거지를 공격하기 위해 구 번의 국부였던 시마즈 히사미쓰에게 원로원 의관 야나기하라 사키미쓰를 칙사로 삼아 파견했다. 3월 7일에 가고시마에 도착했지만, 히사미쓰는 사쓰마군을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구 주군의 은혜를 베풀어도 효과가 없다고 판단했다.
칙사들은 나카하라 등을 석방시키고, 탄약 제작소와 포대를 파괴하고, 화약과 탄약을 몰수하여 철수했다.[86] 이로 인해 사쓰마군은 그 이후 전투에 큰 차질을 빚게 된다.
구마모토성 포위가 해제된 4월 23일, 정부는 참군 가와무라 준기 해군중장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별동 제1여단·별동 제3여단 2개 대대를 주력으로 하는 육해군 혼성군을 가고시마에 파병했다. 그러나 4월 27일에 상륙하여 본영을 설치한 가와무라 참군은 정세를 판단하여 증원을 요청했다. 거기서 정부는 새롭게 제4여단·별동 제5여단 1개 대대를 파병했다. 가와무라 참군이 처음으로 착수한 것은 시민 생활의 안정으로, 닌레이 게이쓰 대좌를 임시 현령으로 삼아 경찰 업무를 대행하게 하고, 도망쳐 버린 현관의 체포 및 조사 등을 실시하게 했다. 5월 3일, 신임 현령 이와무라 미치토시가 부임하여 사이고에게 고유서를 보냈다.
3. 10. 2. 신정부군 주력의 가고시마 연락
1877년 2월, 메이지 정부는 내무성 관리인 하야시 도모유키와 가와무라 스미요시 제독을 군함 ''다카오''호에 태워 상황 파악을 위해 파견했다. 사쓰마 번 지사 오야마 쓰나요시는 봉기가 정부의 사이고 암살 시도에 대한 대응이며, 가와무라 제독(사이고의 사촌)이 상륙하여 상황을 진정시킬 것을 요청했다. 오야마가 떠난 후, 무장한 남자들이 ''다카오''호에 승선하려 했으나 격퇴되었다.[3]
다음 날, 하야시는 오야마에게 가와무라를 상륙시킬 수 없으며, ''다카오''호 공격은 대역죄라고 선언했다. 2월 12일 고베로 돌아온 하야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장군과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반란 확산을 막기 위해 일본 제국 육군을 가고시마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 사이고는 부관 키리노 도시아키와 시노하라 쿠니모토를 만나 도쿄로 진군할 의사를 밝혔다. 다수의 자원병을 거절하고 다른 번의 지원도 요청하지 않았으며, 가고시마에 병력을 남겨두지 않았다. 사이고는 군복을 입어 합법성을 높였다. 북쪽으로 진군하는 군대는 악천후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는 9년 전 메이지 유신을 꾀했던 사람들과 유사하여 신의 가호로 해석되기도 했다.[3]
3. 11. 도성 방면의 전투
1877년 2월, 메이지 정부는 내무성 관리인 하야시 도모유키와 가와무라 스미요시 제독을 군함 다카오호에 태워 상황을 파악하도록 가고시마에 파견했다. 사쓰마 번 지사인 오야마 쓰나요시는 봉기가 정부의 사이고 암살 시도에 대한 대응이라고 설명하고, 가와무라 제독(사이고의 사촌)이 상륙하여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을 요청했다. 오야마가 떠난 후, 무장한 남자들로 가득 찬 소형 선박들이 다카오호에 무력으로 승선하려고 시도했지만 격퇴되었다.[3]2월 12일 고베로 돌아온 하야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장군과 이토 히로부미를 만났고, 일본 제국 육군을 가고시마에 파견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같은 날, 사이고는 부관인 키리노 도시아키와 시노하라 쿠니모토를 만나 정부에 질문하기 위해 도쿄로 진군할 의사를 밝혔다. 다수의 자원병을 거절하고 다른 번으로부터 지원을 요청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으며, 공격에 대비하여 가고시마에 병력을 남겨두지 않았다. 합법성을 높이기 위해 사이고는 군복을 입었다. 북쪽으로 진군하는 그의 군대는 사쓰마에서 50년 이상 만에 가장 깊은 눈이 내리는 악천후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는 9년 전 메이지 유신을 꾀했던 사람들이 맞닥뜨렸던 날씨와 유사하여 일부 사람들에 의해 신의 가호로 해석되었다.[3]
전쟁의 귀추를 알 수 없었던 2월 말, 정부는 가고시마의 민심을 수습하고 사쓰마군의 본거지를 공격하기 위해 구 번의 국부였던 시마즈 히사미쓰에게 원로원 의관 야나기하라 사키미쓰를 칙사로 삼아 병사 천 명 남짓과 함께 파견하여 3월 7일에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하지만 히사미쓰는 사쓰마군을 지원하지 않았고, 구 주군의 은혜를 베풀어도 효과가 없다고 판단했다.[86] 칙사들은 나카하라 등을 석방시키고 탄약 제작소와 포대를 파괴했으며, 화약과 탄약을 몰수하고 철수했다. 이로 인해 사쓰마군은 이후 전투에 큰 차질을 빚게 된다.[86]
구마모토 성 포위가 해제된 4월 23일, 정부는 참군 가와무라 준기 해군중장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별동 제1여단(여단장 타카시마 토모노스케)·별동 제3여단 2개 대대(타나베 요시아키 중좌)를 주력으로 하는 육해군 혼성군을 가고시마에 파병했다. 그러나 27일에 상륙하여 본영을 설치한 가와무라 참군은 정세를 판단하여 증원을 요청했고, 정부는 새롭게 제4여단(소가 유준 소장)·별동 제5여단(오야마 이와무 소장) 1개 대대를 파병했다. 가와무라 참군은 닌레이 게이쓰 대좌를 임시 현령으로 삼아 경찰 업무를 대행하게 하고, 도망쳐 버린 현관의 체포 및 조사 등을 실시하게 했다. 5월 3일, 신임 현령 이와무라 미치토시가 부임하여 사이고에게 고유서를 보냈다.


4월 28일 에가이 군사회의 이후, 사쓰마군은 나카지마 타케히코를 진무대(振武隊) 등 11개 중대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가고시마 방면으로 파병했다. 감군 기시마 키요시(貴島清)와 함께 출발한 나카지마는 도중에 베푸 신스케, 가쓰라 히사타케 등과 만나 5월 1일에 군사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베푸 신스케가 요코가와(横川)에 본영을 설치하여 가고시마 방면을 지휘하고, 전선 부대의 나카지마 등은 더 나아가 야마다고(山田郷)에서 가고시마로 진입하기로 했다. 5월 5일에는 늦게 도착한 사가라를 지휘관으로 하는 행진대 등 10개 중대가 진무대와 합류했다.
사쓰마군은 처음에 야마다가도(山田街道)를 통해 시로야마 북쪽으로 나가 후방에서 관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5월 3일에는 비로 인해, 4일에는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냉수로 후퇴했다. 6일에는 서쪽으로 우회하여 가쓰토가와를 건너 기습하려 했으나, 도하 중에 맹렬한 사격을 받고 대패하여 이시키로 후퇴했다. 이 무렵, 사쓰마군은 각 향에서 신병을 모집하여 새로운 진무대 15개 중대를 편성했고, 조카마치(上町) 상인들로 구성된 진무부속대도 만들어졌다.
11일부터 13일까지는 사이마가쿠산(催馬楽山)의 사쓰마군과 해군 군함 룡장(龍驤) 사이에 대규모 포격전이 벌어졌고, 14일부터 17일까지는 정벌군에 의해 사쓰마군의 초석 제조소, 양식 창고 등이 소각되었다. 사쓰마군에 포위되어 시가지 일부를 점령하고 있는 상태인 별동 제1여단은 24일 무라무라(武村)를 공격했으나 패퇴했다. 29일, 제4여단이 사쓰마군의 허를 찌르고 하나쿠라야마(花倉山)와 도리고사카(鳥越坂)에서 돌입했으나, 이 또한 격퇴되었다.
22일, 가와무라 참군은 제4여단 1개 대대 반, 별동 제3여단 2개 중대를 우익, 별동 제1여단 2개 대대 반을 좌익으로 하여 군함 4척과 소형 선박에 나누어 타고, 함포로 지원하면서 시게토미(重富)에 상륙시켜 사쓰마군의 후방을 공격하게 했다. 또한, 군함 룡장을 카지키(加治木) 앞바다로 이동시켜 사쓰마군의 증원을 저지했다. 좌우익 부대의 선전으로 사쓰마군은 결국 시게토미에서 격퇴되었고, 이어 이소(磯) 부근에서 포위 공격을 받고 북쪽으로 패주했다. 이렇게 정벌군은 시게토미를 확보했다. 이에 대해, 23일, 나카지마, 기시마, 사가라는 정벌군에 반격하여, 행진대 8개 중대와 기병대 2개 중대로 스즈미야(雀宮), 게이잔(桂山)을 습격하여 다수의 총기와 탄약을 획득했다.
24일, 별동 제1여단과 별동 제3여단은 대규모 공세에 나서 류쿄(涙橋) 부근에서 교전하는 한편, 군함에 탄 병사들이 후방을 공격하여 사쓰마군을 패주시켰다. 역습한 사쓰마군과 격렬한 백병전이 전개되었으나, 저녁에 폭풍우가 몰아치자, 이를 이용한 정벌군의 맹공에 탄약이 부족해진 사쓰마군은 버티지 못하고 요시노로 후퇴했다. 이 무라사키바루(紫原) 지방의 전투는 가고시마 방면에서 벌어진 최대의 격전으로, 정벌군 211명, 사쓰마군 66명의 사상자를 냈다. 다음 날 25일, 제4여단은 시모다가도(下田街道)를 남하하여 사카모토(坂元), 사이마가쿠(催馬楽), 게이잔에서 베푸 부대, 진무대 10번 중대의 후방을 공격하여 요시노로 몰아넣었다. 26일에는 동 여단이 도리고미치(鳥越道)와 게이잔의 두 방향에서 전진 공격하자, 사쓰마군은 저항하지 않고 가와카미 지방으로 후퇴했다.
가와지 소장이 이끄는 별동 제3여단은 6월 23일, 미야노조에 진입하여 가와우치가와 건너편과 하류의 薩軍(사쓰마군)을 공격했다. 일제 격돌을 받은 薩軍(사쓰마군)은 격전 끝에 결국 가고시마 가도(街道)를 향해 후퇴했다. 별동 제3여단 부대는 다음 날 24일에는 사이마가쿠(催馬楽)에 이르러 薩軍(사쓰마군)의 보루를 차례로 함락시키고, 저녁에는 모두 가고시마에 들어가 가고시마 주변의 薩軍(사쓰마군)을 격퇴했다. 이렇게 해서 정벌군 주력과 가고시마 상륙군의 연락이 닿았다.
후퇴한 薩軍(사쓰마군)은 도시에 집결할 것이라고 예측한 가와무라 참군은 29일, 별동 제1여단을 해상으로부터 타리미즈(垂水)·타카스(高須)로, 제4여단을 요시다(吉田)·가모(蒲生)로, 별동 제3여단을 오카하라(岡原)·히시지마(比志島)를 경유하여 가모(蒲生)로 진격시켜 도시(都城)를 양면 공격하기로 했다. 또한 해군에는 시게토미(重富) 앞바다에서의 지원을 시키고, 가고시마에는 제4여단의 1개 대대를 남겨두었다.
4. 결과 및 영향
4월 21일, 사쓰마군은 야베하마정에서 군사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무라타 신파치와 이케가미는 대대 지휘장에서 물러나 본영에 소속되어 군의에 참여하기로 결정되었다. 또한 전군을 중대 편제로 재편하고, 사쓰마, 오스미, 히우가 3개 주에 근거지를 마련하며, 히토요시를 그 중심지로 삼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22]
이후 사쓰마군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시이하라 고개를 넘어 히토요시 분지로 퇴각했다. 4월 27일, 히토요시 분지에 도착한 사쓰마군은 본영을 히토요시에 설치했다. 다음 날인 28일, 에다이에 도착한 기리노는 출장 본영을 설치하고 군사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는 히토요시에 야전병원과 탄약 제조창을 설치하고 각 방면에 부대를 배치하는 방안이 결정되어 실행에 옮겨졌다.[22]
전쟁 중이던 5월, 부상자 구호를 위해 박애사(일본적십자사의 전신)가 설립되었다. 부상병 이송을 위한 앰뷸런스(구급마차)도 준비되었다.[83] 6월부터는 아오모리현(62명), 이시카와현(35명) 등에서 관군 종군 지원자들이 속속 도착하여,[84] 전시 체제가 정비되어 갔다.
6월 1일 새벽, 정벌군은 여러 갈래로 히토요시를 향해 진격했다. 사쓰마군은 각 방면에서 패배하여 히토요시와 오하타로 물러났다. 이 소식을 접한 추진무라의 붕익대 6번 중대, 뢰격대 5번 중대, 파죽대 1번 중대 등은 오하타로 후퇴했다. 하라다무라의 간성대 8번 중대, 신무대 2번 중대 등은 히토요시의 위기를 듣고 전투를 벌이며 히토요시로 향했다.
한편, 기리노는 미야자키에서 가고시마 방면과 분고 지역의 군대를 총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미야자키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기 위해 지청을 점령하고 군무소로 개칭했다. 히토요시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무라타 신파치 등은 사이고의 안전을 위해 이케가미에게 호위를 맡겨 미야자키 군무소로 이동시켰다. 사이고가 도착한 5월 31일, 미야자키 군무소는 사쓰마군의 새로운 본영이 되었고, 군표(사이고 삿슈)를 발행하여 재정 재건을 도모했다.
2월 말, 정부는 가고시마 민심을 수습하고 사쓰마군의 본거지를 공격하기 위해 시마즈 히사미쓰에게 야나기하라 사키미쓰를 칙사로 파견했다. 3월 7일 가고시마에 도착한 칙사 일행은 병사 천여 명을 동원했으나, 히사미쓰는 사쓰마군을 지원하지 않았다.
칙사들은 나카하라 등을 석방하고 탄약 제조창과 포대를 파괴한 뒤 화약과 탄약을 몰수하고 철수했다.[86] 이는 이후 사쓰마군의 전투 수행에 큰 차질을 빚게 했다.
4. 1. 사족 계급의 몰락과 무사도 정신의 변질
메이지 유신과 보신 전쟁의 주요 세력이었던 사쓰마 출신 사무라이들은 메이지 정부의 근대화 정책으로 인해 특권적 신분이 폐지되고 재정적 지위가 약화되면서 불만이 커졌다.[3]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 논쟁에서 조선과의 전쟁을 주장했으나 거부되자, 정부 직책에서 사퇴하고 가고시마로 돌아갔다.[3]사이고는 1874년 가고시마에 사학관이라는 사립 학원을 설립했고, 곧 현 전체에 132개의 분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들은 군사 훈련과 전술 교육을 제공하며 준군사 정치 조직과 흡사했다.[4] 1876년 말까지 사쓰마는 중앙 정부로부터 사실상 분리되었다.[4]
메이지 정부는 사무라이들의 반란 가능성을 우려하여 경찰관을 파견해 조사하게 했으나, 이들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사이고 암살을 위한 스파이라고 자백했다. 이는 반란의 명분이 되었다.[3] 1877년 1월 30일, 메이지 정부는 군함을 보내 가고시마 병기고의 무기를 제거하려 했고, 이는 사무라이들의 분노를 사 공개적인 갈등으로 이어졌다.[3]

사쓰마 반란 진압에는 총 4.2억엔이 소요되었고, 일본은 금본위제에서 벗어나 지폐를 발행하게 되었다. 경제적 영향으로 지방세가 감세되고, 국채가 증가했다.[8] 메이지 정부는 국영 기업을 헐값에 매각해야 했고, 이는 자이바쓰의 형성으로 이어졌다.[9] 한편, 사이고의 침략 제안을 지지했던 군국주의 파벌은 겐요샤와 흑룡회와 같은 일본 우익 단체로 발전했다.[10]
이 반란은 평민 징집병으로 구성된 일본 제국 육군이 전투 능력을 증명함으로써 사무라이 계급을 사실상 종식시켰다. 사무라이의 패배는 근대적인 포병과 소총의 위력을 보여주었다.[11] 1889년 2월 22일, 메이지 천황은 사이고를 사후에 사면했다.[12] 우에노 공원(도쿄)과 가고시마 성 폐허 근처에는 그의 기념비가 서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국민들에게 비극적인 영웅으로 묘사되었고, 그의 행동은 무사도와 야마토다마시이의 영예로운 본보기로 여겨졌다.
4. 2. 메이지 정부의 권력 강화와 중앙집권화
메이지 정부는 세이난 전쟁에서 승리하며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확고히 했다.[7] 이 과정에서 일본은 금본위제에서 벗어나 정부가 지폐를 발행하게 되었다.[7] 또한, 지방세 감세 법률이 통과되었지만, 국채는 크게 증가했다.[8]메이지 정부는 사무라이 계급을 진압하는 데 막대한 비용을 소모하여 파산 직전에 몰렸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영 기업을 헐값에 매각했다. 이는 대규모 산업 회사, 즉 자이바쓰의 형성에 기여했다.[9] 마쓰카타 마사요시 재무대신은 철도, 전신, 군수 산업을 제외한 국영 기업을 매각하고, 해외 유학생 장학금을 취소하며 외국 전문가들을 해고했다.[9]
한편, 사이고 다카모리의 침략 제안을 지지했던 군국주의 파벌의 잔당은 겐요샤, 흑룡회와 같은 일본 우익 단체로 발전했다.[10]
이 반란을 통해 평민 징집병으로 구성된 일본 제국 육군의 전투 능력이 입증되었고, 사무라이 계급은 사실상 종식되었다.[11] 근대적인 포병과 소총의 위력 앞에서 사무라이의 만세 돌격은 효과가 없었다.[11] 1889년 2월 22일, 메이지 천황은 사이고 다카모리를 사후에 사면했다.[12] 우에노 공원(도쿄)과 가고시마 성 폐허 근처에는 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사이고 다카모리는 국민들에게 비극적인 영웅으로 묘사되었고, 그의 행동은 무사도와 야마토다마시이의 영예로운 본보기로 여겨졌다.
4. 3. 경제적 혼란과 자본주의 발달
세이난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전비 지출은 정부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총 4억 2천만 엔(840만 파운드)에 달하는 전비[7]는 당시 일본 경제 규모에 비해 엄청난 액수였다.결국 일본은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정부가 지폐를 발행하게 되었다.[7] 그러나 이는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1877년 2월 4일, 정부는 지방세를 3%에서 2.5%로 감세하는 조치를 취했지만,[8] 인플레이션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연간 지출은 1,370만 파운드에서 1,025만 파운드로 줄었지만, 국채는 2,800만 파운드에서 7,000만 파운드로 급증했다.[8]
메이지 정부는 재정 파탄 직전에 몰렸다.[9] 정부는 국영 기업(공장, 광산 등)을 정치적으로 연결된 상인과 전직 관리들에게 헐값에 매각해야 했다.[9] 이는 대규모 산업 회사, 즉 자이바쓰의 형성을 촉진했다.[9]
마쓰카타 마사요시 재무대신은 철도, 전신, 군수 산업을 제외한 국영 기업들을 정치적으로 연결된 자본가들에게 매각하는 결정을 내렸다.[9] 그는 또한 해외 유학생 장학금을 취소하고 외국 전문가들을 해고했다.[9]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일본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마쓰카타 디플레이션: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재정 개혁은 경제 안정에는 기여했지만, 농민의 몰락과 빈부 격차 심화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 초기 자본가 성장: 일부 대지주와 재벌은 자본을 축적하여 초기 자본가로 성장했고, 이는 일본 자본주의 발달의 계기가 되었다.
4. 4. 일본 제국주의의 발흥과 한국에 대한 영향
세이난 전쟁은 일본이 근대 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지만,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 발흥의 계기가 되었다. 특히,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장했던 정한론은 비록 세이난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이후 일본의 대외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사이고 다카모리는 1873년 정한론 논쟁에서 조선과의 전쟁을 강력하게 주장했다.[3] 그는 조선을 직접 방문하여 전쟁의 명분을 만들고자 했으며, 전쟁을 통해 사무라이들이 의미 있는 죽음을 찾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3]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당시 일본 내에서 팽배했던 제국주의적 팽창 욕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세이난 전쟁 이후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하고 대외 팽창 정책을 본격화했다. 이는 곧 한국에 대한 침략으로 이어졌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1894년~1895년 청일전쟁, 1904년~1905년 러일전쟁 등을 거치면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결국 1910년에는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했다.
세이난 전쟁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드러낸 사건이며, 이는 한국에 대한 침략으로 이어져 일제강점기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초래했다.
5. 정부군 편제
직책 | 이름 | 계급 | 비고 |
---|---|---|---|
가고시마 반역자 토벌 총독 |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 친왕 | |
토벌 총감부 | |||
부사령관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육군 중장 | |
부사령관 | 가와무라 스미요시 | 해군 중장 | |
서기 | 후쿠시마 야스마사 | ||
신센 여단 | |||
사령장관 | 고마쓰노미야 아키히토 친왕 | 육군 소장 | 메이지 10년(1877년) 5월 29일- |
대대장 | 다쓰미 나오후미 | 육군 소좌 | |
제1여단 | |||
사령장관 | 노즈 시즈오 | 육군 소장 | |
참모 | 사게지마 시게오 | 육군 공병 중위 | 4월- |
제2여단 | |||
사령장관 | 미요시 시게오미 | 육군 소장 | 2월 29일- |
오야마 이와오 | 육군 소장 | 3월 10일- (별동 제1여단 사령장관 겸임) | |
구로카와 미치노리 | 육군 대좌 | 5월 13일- | |
참모장 | 노즈 미치쓰라 | ||
사관 | 우에다 아리사와 | ||
제3여단 | |||
사령장관 | 미우라 고로 | 육군 소장 | 3월 10일- |
대위 | 가와무라 가게아키 | 육군 대위 | -4월 |
제4여단 | |||
사령장관 대리 | 구로카와 미치노리 | 육군 대좌 | 4월 15일- |
사령장관 | 소가 스케노리 | 육군 소장 | 4월 16일- |
별동 제1여단 | |||
사령장관 | 오야마 이와오 | 육군 소장 | 2월 27일- |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 3월 28일- | ||
참모장 | 오카자와 구와시 | ||
참모 | 니시 간지로 | ||
하사 | 쓰다 산조 | 3월 11일- | |
별동 제2여단 | |||
사령장관 | 야마다 아키요시 | 육군 소장 | 3월 28일- |
야마카와 히로시 | 중좌 | ||
보병 제1연대 중대장 대리 | 안도 데이비 | 중위 | |
소위 시보 | 나카무라 사토루 | 소위 시보 | |
별동 제3여단 | |||
사령장관 | 가와지 도시요시 | 육군 소장 겸 경시청 경시총관 | |
오야마 이와오 | 육군 소장 | 6월 28일- (별동 제5여단 사령장관 겸임) | |
별동 제5여단 | |||
사령장관 | 오야마 이와오 | 육군 소장 | 4월 13일- |
구마모토 진다이 | |||
사령장관 | 다니 다테키 | 육군 소장 | |
참모장 | 가바야마 스케노리 | 육군 중좌 | |
참모 부장 | 고다마 겐타로 | 육군 소좌 | |
구마모토 진다이 보병 제13연대 | |||
연대장 | 요쿠라 도모자네 | ||
연대장 대리 | 가와카미 소로쿠 | 육군 소좌 | |
대대장 | 오쿠 야스카타 | ||
구마모토 진다이 보병 제14연대 | |||
연대장 대리 | 노기 마레스케 | 육군 소좌 | |
군기 | 가와라바야시 유타 | 육군 소위 | |
도쿄 진다이 보병 제2연대 (사쿠라) | |||
연대부 | 이치노헤 효우에 | ||
도쿄 진다이 보병 제3연대 (다카사키) | |||
장교 | 우메자와 미치하루 | ||
나고야 진다이 보병 제6연대 (나고야) | |||
연대장 | 사쿠마 사마타 | ||
오사카 진다이 보병 제8연대 (오사카) | |||
제1대대장 | 오시마 요시마사 | 육군 보병 소좌 | |
히로시마 진다이 보병 제11연대 (히로시마) | |||
대대장 | 가와무라 가게아키 | 육군 소좌 | 4월- |
히로시마 진다이 보병 제12연대 (마루가메) | |||
연대장 | 구로키 다메모토 | ||
둔전병 | |||
중대장 | 나가야마 다케시로 | ||
경시부대 | |||
히가키 나오에 | |||
사가와 간베 | |||
사이토 하지메 | 전 신센구미 대사 | ||
해군 함대 | |||
지휘관 | 이토 스케마로 | 해군 소장 | |
그 외 종군자 | |||
이시구로 다다노리 | 군의 | ||
이주인 고로 | |||
오우라 가네타케 | |||
오사코 나오미치 | 육사생도 | ||
가미오 미쓰오미 | |||
사토 다다시 | |||
시미즈 조쿠 | |||
다무라 긴노스케 | |||
데라우치 마사타케 | |||
도조 히데노리 | |||
하마노 노보루 | 군의 | ||
야마구치 모토오미 | 대대장 | ||
데즈카 료센 | 군의 |
1873년 징병법에 따라 일본은 6개의 군관구로 나뉘었고, 징집 대상자는 추첨으로 결정되었다. 징집된 사람들은 7년간 복무(현역 3년, 예비역 4년)했고, 현역으로 뽑히지 않은 사람들은 20년간 국민군으로 복무했다.[5]
기병대는 전시에 15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근대전에 적합한 말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황실 근위대 기병대를 포함하여 총 3개 기병대(450명)만 운용 가능했다. 보병 연대는 각각 1,088명의 병사와 16명의 대대 참모로 구성된 3개 대대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대가 14개 존재하여 총 45,920명의 보병이 있었다. 공병대는 150명으로 구성되었고, 10개의 공병대가 있어 총 1,500명의 공병이 있었다. 수송대는 80명으로 구성되었고, 총 6개의 수송대가 있어 총 480명이 있었다. 또한 100명으로 구성된 연안포병 대대가 9개 있어 총 900명이었다.[5]
이동포병은 1,920명으로 구성된 산악포병 중대 12개와 780명으로 구성된 야포 중대 6개로 구성되었으며, 각 중대에는 12문의 포가 있었다. 이동포병에는 총 2,700명과 108문의 포가 있었다.[5]
보신 전쟁 당시 친정부군에서 뽑힌 황실 근위대는 2개 보병연대(4,384명), 1개 기병대(150명), 1개 포병대대(12문의 포와 290명), 1개 공병대(150명), 1개 수송대(80명)로 구성되어 총 5,054명이였다.[5]
6. 세이난 전쟁의 의의
사쓰마 출신 사이고 다카모리는 메이지 유신의 주요 인물 중 하나였으나, 메이지 정부의 개혁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정한론을 주장하며 조선과의 전쟁을 강하게 주장했으나, 이 계획이 거부되자 정부 직책에서 사퇴하고 고향 가고시마로 돌아갔다.[3]
사이고는 가고시마에 사학관이라는 사립 학원을 설립하여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을 모았다. 이 학교는 군사 훈련과 전술 교육을 제공하는 준군사 조직과 흡사했으며, 1876년 말까지 사쓰마는 중앙 정부로부터 사실상 분리되었다.[4]
이 전쟁은 흔히 "사쓰마 반란(Satsuma Rebellion)"이라고 불리지만, 마크 라비나(Mark Ravina)는 이 명칭이 전쟁의 규모와 일본식 명칭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남서 전쟁(War of the Southwest)"이라는 명칭을 선호한다.[13]
6. 1. 경제적 의의
메이지 정부는 1871년 폐번치현으로 전국 직할화를 완성했지만, 각 번의 빚과 사족에게 봉록을 지급해야 하는 의무를 이어받아 재정난에 시달렸다. 가록 지급이 세출의 30%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이에 정부는 적자 재정 건전화를 위해 생산 활동을 하지 않고 봉록을 받는 특권 계급인 사족 폐지를 목표로 사민평등을 강조했다. 1873년 징병제, 1876년 녹봉처분을 시행하여 사족 해체 방향을 결정지었다.세이난 전쟁에 투입된 정부의 군사비는 41억엔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세수 48억엔의 대부분을 사용할 정도로 막대한 금액이었다. 정부는 전투비 조달을 위해 불환지폐를 발행하여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 이후 일본 대장성 마쓰카타 마사요시에 의해 증세, 관영 기업 불하, 통화 정리가 이루어져 일본이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마쓰카타 디플레이션[164]으로 농민의 소작화가 진행되어(소작농률 전국 평균 38%→47%) 대지주가 발생하였다. 또한, 소작을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곤궁한 자들은 도시로 유입되어 재벌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저임금 노동을 하며 도시 빈곤층이 확대되었다. 재정난으로 '원칙 국유'였던 철도 건설이 어려워져 사유 자본에 의한 철도 건설이 진행되었다.
세이난 전쟁의 결과, 사족 계층의 특권은 부정되고 몰락이 결정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경제 혼란은 빈부 격차를 확대시켜 많은 농민들이 몰락하고 소작농이 되었다. 반면, 일부 대지주나 재벌은 자본을 축적하여 초기 자본가가 나타나는 계기가 되었다. '신분'보다 '돈'이 우선시되는 사회가 도래하며 결과적으로 일본의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사쓰마 반란 진압에는 총 42억엔[7]이 소요되어 일본은 금본위제에서 벗어나 정부가 지폐를 발행하게 되었다. 반란의 경제적 영향으로 1877년 2월 4일 법률이 통과되어 지방세가 3%에서 2.5%로 감세되었다. 반란으로 인해 일본의 연간 지출은 13.7억파운드에서 10.25억파운드로 줄었지만, 국채는 28억파운드에서 70억파운드로 증가했다.[8] 전직 사무라이들을 진압하는 비용으로 메이지 정부는 사실상 파산 직전에 몰렸다. 정부는 공장과 광산과 같은 국영 기업을 정치적으로 연결된 상인과 전직 관리들에게 헐값에 매각해야 했고, 이는 대규모 산업 회사 또는 자이바쓰의 즉각적인 형성으로 이어졌다. 국영 기업들은 손실을 보고 있었고, 마쓰카타 마사요시 재무대신은 철도, 전신, 군수 산업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연결된 자본가들에게 손실을 감수하고 모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해외 유학 중인 일본 학생들의 장학금을 취소하고 외국 전문가들을 해고했다.[9]
6. 2. 군사적 의의
세이난 전쟁은 일본 최후의 내전으로, 사족이라는 군사 전문직의 존재를 소멸시켰다. 사족 중심의 사이고군을 징병 또는 직업 군인을 주체로 한 정부군이 승리함으로써, 사족 출신 병사나 농민 출신 병사나 전투력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징병제에 의한 국민개병체제가 정착되었다.[165]정부군은 승리의 원인이 근대적 장비, 화력, 통신 수단, 지휘 능력의 차이에 있음을 바로 파악하여 세이난 전쟁 후 군의 근대화 노선에는 징병을 기반으로 한 상비군을 두었고, 장비 통수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노선으로는 변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진다이 병사는 징병과 화력으로 이겼으면서도, 전술적 전투에서는 여러 차례 사이고 군의 사족 병사에게 패배하였다.[165] 병사의 전의, 사기 문제는 정부군에 있어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세이난 전쟁의 교훈으로 징집된 병사들에 대한 정신 교육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사이고 군의 사기가 높았던 것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총대장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메이지 정부는 천황을 일본 제국 육군, 해군의 대원수로 앉혀 군의 사기 고양을 도모하게 되었다.[166]
스나이더 총을 채택했어도 사이고 군이 엔필드 총으로 싸웠기 때문에, 거액의 전비를 소비하고도 이를 진압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였고, 구식이어도 전투 능력에 뛰어난 전장총이 각지에 분산 보관된 상황을 위험하게 여긴 정부는 세이난 전쟁 후 메이지 11년부터 이것을 회수, 모아서 스나이더 총으로 개조하여 군에 의한 무기 제조 시설의 독점과 군용 총의 소지를 엄격히 규제함으로써 국민의 무장에 대해 내란의 재발을 방지하는데 힘썼다.[167]
참조
[1]
서적
Modern Japan: A Historical Survey
[2]
웹사이트
The Satsuma Rebellion
https://www.thoughtc[...]
ThoughtCo
2019-03-16
[3]
서적
1973
[4]
서적
A Modern History of Japan from Tokugawa Times to the Present, Second Edi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5]
서적
Japanese Armies 1868–1877: The Boshin War & Satsuma Rebellion
Osprey Publishing
2020
[6]
서적
[7]
서적
The Satsuma Rebellion: An Episode of Modern Japanese History
[8]
서적
The Satsuma Rebellion: An Episode of Modern Japanese History
[9]
서적
East Asia: a cultural,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Houghton Mifflin
2006
[10]
서적
Why Has Japan 'Succeeded'?: Western Technology and the Japanese Etho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11]
서적
Samurai: The World of the Warrior
Osprey Publishing
2003
[12]
서적
Japan Goes to War: A Chronology of Japanese Military Expansion
Diane Publishing
[13]
서적
The Last Samurai: The Life and Battles of Saigo Takamori
https://books.google[...]
John Wiley and Sons
2011-08-07
[14]
웹사이트
The Last Samurai: The True History Behind The Film
https://www.warhisto[...]
War History Online
2016-11-11
[15]
문서
鹿児嶋戦場名覧
静岡県立中央図書館
1877-05-22
[16]
문서
西南記伝中巻1
[17]
문서
砲第五号 砲兵支廠鹿児島属廠設置之スナイトル弾薬器械其廠ヘ備附其廠ニ於テ製作可致此旨相達候事但入費之儀ハ其廠額金之内ヲ以取計 追而不足之節可申出事 十年一月八日 陸軍卿山県有朋
[18]
문서
局三四号 砲兵支廠ニ於テスナイトル弾薬製作之義ニ付伺 スナイトル弾之義是迄砲兵支廠ニ於テ製造不致処第二方面内歩工兵員三分ノ二ヲ過キ同銃携帯致居候ニ付当今、鹿児島属廠制作之同弾ヲ以支廠送付致シ然ル後再ヒ各地江配賦致有之候右ハ隔他之場処運搬致候益之矢且緩急之際不都合不少候ニ付左之迄御決定御指令相成度御達案相添此段相伺候也 第三局長代理 十年一月八日陸軍大佐福原実二 陸軍卿山縣有朋殿伺之通 一月十日但入動廠 額金内点報 多少 通御達相成度候也 小砲兵支廠御達案 鹿児島属廠設置之スナイトル弾業器械其廠備付
[19]
문서
参第二百六十号副 第三坤天式十壱号 至急局百二十三号 スナイトル弾製造器械砲兵支廠江御備附之義伺 一スナイトル弾製造器械一基 但一日六千発製出之分 右砲兵本廠ニ備附之分砲兵支廠江送達同廠ニ於テ右弾製作致候様仕度御達案相添此段相伺候也 十年二月十三日 第三局長代理陸軍大佐福原實 陸軍卿代理 陸軍少輔大山巖殿 伺之通相達候事 二月十三日 砲兵本廠江御達案 一スナイトル弾製造器械一基 右砲兵支廠江備附右弾製作可為致ニ付其廠在来之器械至急同廠江送達可取計此旨相達候事 砲兵支廠江御達案 一スナイトル弾製造器
[20]
문서
候間至急御返却有之度猶及御掛合候也 壬申七月十三日 大蔵省 陸軍省御中 第七百二十三号 スナイトル銃空包 六万四百八拾発 入箱式拾壱個 但壱箱弐千八百八十宛 右陸軍省御用ニ付可差出旨於此県西郷少輔殿ヨリ致承知今般有功鑑ヘ積入差廻候間着船之上御請取相成度荷作其他本艦迄運送入費ハ当処会計掛ヨリ明細書差出候間急便御差送候被下度此段御伺申上候也 壬申六月廿六日 鹿児島県 大砲製造所 陸軍省秘史局御中 第七百二十四号 城地御伺之義ニ付申上書 陸省官員出張ヲ以御取調有之候福島城之義委詳別紙之通当四月中相伺置候
[21]
서적
西郷隆盛と薩摩
[22]
서적
薩南血涙史
[23]
서적
兵器と戦術の日本史
中公文庫
2014
[24]
문서
西郷暗殺計画
[25]
문서
西郷の言葉「ちょしもたー」の意味
[26]
문서
中原の救出とその後
[27]
문서
不明な情報
[28]
문서
薩軍の長崎奪取重視と戦争目的の逸脱
[29]
문서
薩軍出陣の「練兵場」
[30]
문서
西南戦争における薩軍出陣の「練兵場」について
[31]
서적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32]
문서
日本の電信と軍事利用
[33]
서적
乃木希典と日露戦争の事実
[34]
문서
谷口四郎兵衛、関川代次郎
[35]
문서
砲第九十八号 カットリング弐門以下福岡エ差送ノ儀ニ付伺 南ノ関出張先福原大佐ヨリ別紙ノ通電報有之候ニ付申越ノ通可差送候哉此段相伺候也 明治十年三月四日 砲兵本廠提理陸軍大佐大築尚志 陸軍卿殿代理陸軍少将西郷従道殿 伺ノ通 但臼砲二門榴弾百発焼弾百発木管属具共並ニカットリング砲二門弾薬六千五百発至急送達可致事 三月五日
[36]
문서
陸第千百七十五号 甲第七十四号 至急砲弐百六十八号 大坂支廠ヨリ電報之儀ニ付伺
[37]
문서
局第三百五十八号 スナイトル弾薬材料御買上之義ニ付伺
[38]
문서
砲第百七号 スナイドル弾薬製造所其他建築費及ビ器械修理費御渡ノ儀ニ付伺
[39]
문서
東四十八号 其@歩兵第二連隊第二大隊之内三中隊昨年@大阪鎮台@携帯スナイトル致ツンナール銃与交換出征@戦地ヨリ@ニ本営へ引揚@付@引渡方@五第三千十七号大阪鎮台伺出@之通及指令候条@心得此旨相達候事
[40]
문서
砲第百三十八号
[41]
문서
局第三百七十四号 ツンナール銃及弾薬共砲兵支廠江送附之儀ニ付伺
[42]
문서
五@千六百三十一号 第三伸@法@十九号 甲第三十二号 大二百十九号 元遊撃歩兵第五大隊出征用兵器彈薬返納之義ニ付伺
[43]
문서
大阪鎮台号 別紙即チ辞第一号 第四百十八号 医歩兵第五大隊出征候申付之付来ル二十四日神戸出帆熊本此段候ニ付該隊候可相度ツンナール弾薬二十五至急神戸港マテ輸送之上引渡可申此鶏相達候事
[44]
문서
参第四百五十五号 第三伸天四十八号 至急 局第二百七十号 改造銃代価積り問合之儀二付伺
[45]
문서
至急 参第七百九号控 第三伸天八拾弐号 局第参百八拾壱号 スナイドル弾製造器械御借受之儀ハ付伺
[46]
문서
局五百八十四号参千九十一号スナイドル弾薬空筒五百万発御買上之儀伺
[47]
문서
月五百〇九号壱第千八十九号 長崎居留英商ギリブル方江三百万発之スナイドル早合二ヶ月内到着之筈於我政府約定相成候趣別紙写之通在上海品川領事ヨリ申越候処右は於貴省御約条相成候品ニ候哉貴省ニおゐて御約定ニ候ハハ二ヶ月内ハ何月幾日より之事ニ候哉為心得承知致度此段及御問合候至急御廻答有之度候也
[48]
문서
鎮台側による自焼説が有力
[49]
서적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50]
문서
これも籠城側が射界を確保するための自焼ともいわれる
[51]
서적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52]
문서
歩兵第13連隊貴下の隈岡長道、小島政利両大尉指揮の2個中隊
[53]
문서
後に農商務大臣
[54]
문서
後に海軍大臣・軍令部長
[55]
문서
後に陸軍大臣・参謀総長
[56]
문서
後に参謀総長
[57]
문서
後に参謀総長・元帥
[58]
문서
後に陸軍大将。陸軍大学校教官[[クレメンス・ヴィルヘルム・ヤーコプ・メッケル|メッケル]]から児玉と並んで優秀と評される。
[59]
문서
後に陸軍大将。[[日露戦争]][[旅順攻囲戦]]で[[203高地]]を攻略した[[第七師団]]長
[60]
문서
段山は藤崎台とは5m半程しか離れておらず、頂上から藤崎台を見渡せたのでここから城内を射撃することが出来た。司馬遼太郎は著書『翔ぶが如く』で「段山の存在は熊本城唯一の欠点とされており」と言及しており、熊本城の築城主である加藤清正が自分一代で支城として要塞化する余裕がなかったのかもしれない、と推定している。段山は後年、鉄道開通に伴って藤崎台から分離され、その後削平されて現在は消失しているが、少し離れた井芹川沿いの熊本市西区島崎1丁目に薩軍戦没者慰霊碑が建てられており往時を偲ぶことが出来る。
[61]
서적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62]
문서
第三大隊のうち第一第二中隊は高瀬経由で、第四中隊は山鹿街道からそれぞれ熊本を目指した
[63]
서적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64]
서적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65]
서적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66]
서적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67]
논문
製造中の2大鋼鉄艦船のトン数
https://dl.ndl.go.jp[...]
春陽堂
[68]
서적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69]
방송
時刻歴史が動いた
[70]
서적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71]
書籍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72]
書籍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73]
書籍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74]
書籍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75]
문서
この日の攻撃で12名が戦死し36名が負傷する大打撃を受けている
[76]
書籍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77]
書籍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78]
書籍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79]
書籍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80]
書籍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81]
書籍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82]
書籍
歴史群像シリーズ「西南戦争」
[83]
和書
博愛社発会式の祝辞
https://dl.ndl.go.jp[...]
積善館・松本仁吉
[84]
和書
国中の人民従軍を願い、その外軍人を愛恤すること
https://dl.ndl.go.jp[...]
東壁堂・吉村明道
[85]
書籍
『西南記伝』辺見十郎太伝
[86]
書籍
[87]
書籍
『大西郷突囲戦史』
[88]
문서
後に六番・七番大隊として再編され、中隊規模の兵力で編成された
[89]
和書
10年10月調 熊本鎮台諸隊人名表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9080692400、熊本鎮台戦闘日記附録 但諸表並死傷之部 共23冊 明治10年2月21日~明治10年10月6日(防衛省防衛研究所)
2019-01-03
[90]
和書
3月6日 7等判事 近野種徳他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9081313100、本営通牒 明治10年2月20日~10年9月31日(防衛省防衛研究所)
2019-01-03
[91]
和書
3月27日 第2大隊第1中隊は2月11日小倉発長崎に分遣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9080716700、歩兵第14連隊 10年役日誌草稿 単 明治10年2月6日~明治10年4月15日(防衛省防衛研究所)
2017-09-21
[92]
書籍
兵旅の賦〈第1巻〉明治大正編―北部九州郷土部隊70年の足跡
北部九州郷土部隊史料保存会編
[93]
和書
4月5日 第1大隊第1中隊は南田嶋の賊塁を攻撃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9080717300、歩兵第14連隊 10年役日誌草稿 単 明治10年2月6日~明治10年4月15日(防衛省防衛研究所)
2019-01-03
[94]
웹사이트
4月11日 〔第1連隊3大隊等の戦死地名の訂正5件〕
http://www.jacar.go.[...]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9083234800、雑件綴 ロ7 明治11年2月7日〜11年10月3日(防衛省防衛研究所)
[95]
和書
歩兵第2連隊第1大隊第3中隊将校以下名簿合計135名 沖原大尉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9085648600、編冊 明治10年5月4日~10年10月25日(防衛省防衛研究所)
2019-01-03
[96]
和書
歩兵第2連隊第1大隊第3中隊人員表総計132名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9085649700、編冊 明治10年5月4日~10年10月25日(防衛省防衛研究所)
2019-01-03
[97]
和書
願第345号 9月10日 軍刀払下の件 月岡中尉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9081380100、自己願書綴 指令済之部 明治10年5月6日~10年10月30日(防衛省防衛研究所)
2017-09-23
[98]
和書
5月6日 歩兵第2連隊第2大隊第2中隊付被免同大隊第1中隊付被仰付 少尉一戸兵衛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9082528800、請書 明治10年5月28日~10年9月24日(防衛省防衛研究所)
2019-01-03
[99]
문서
東京鎮台諸隊から選抜されて編成
[100]
和書
6月4日 歩兵第6連隊第3大隊第2中隊長代理 陸軍中尉中村覺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9084789000、戦闘報告表 明治10年5月18日~10年7月10日(防衛省防衛研究所)
2017-09-21
[101]
웹사이트
4月9日 菱川中尉 軍曹五十嵐重明戦闘履歴書可然御取計被下度及御依頼候也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9085576700、来翰 共6の5 明治12年1月7日~12年6月31日(防衛省防衛研究所)
[102]
웹사이트
下硯川に在る
http://www.jacar.go.[...]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9083524400、戦闘景況戦闘日誌 明治10年2月26日〜10年9月3日(防衛省防衛研究所)
[103]
웹사이트
6月5日 中尉富田春壁5月30病気入舎6月2出勤御届外 石本少佐
http://www.jacar.go.[...]
2014-08-18
[104]
웹사이트
友安大尉 三ノ嶽戦闘の景況報告
http://www.jacar.go.[...]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9083496800、戦闘報告 明治10年3月15日〜10年7月18日(防衛省防衛研究所)
[105]
和書
5月15日 竹中大尉 歩兵第10連隊第2大隊第2中隊後備2等卒前田常十郎戦闘度数確認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9084688600、凱旋後死亡之者勲功調併 戦闘度数比準表 明治11年2月20日~13年6月3日(防衛省防衛研究所)
2018-05-25
[106]
웹사이트
3月4日 第11連隊第2大隊第3第4中隊外当地御届 曽祢大尉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07]
웹사이트
第1連隊連隊長茨木中佐第1大隊長古川少佐第2大隊長永田少佐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17-09-23
[108]
웹사이트
出征第2旅団中隊長優等表
http://www.jacar.go.[...]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09]
웹사이트
引頭大尉第1聨隊第2大隊長心得被付度申進
http://www.jacar.go.[...]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10]
웹사이트
戦死人名 士官の部 陸軍大尉 引頭高倫他
http://www.jacar.go.[...]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11]
웹사이트
丙の部 第2大隊第2中隊長 大尉 知識兼治 他
http://www.jacar.go.[...]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12]
웹사이트
3月5日 陸軍大尉 引頭高倫他
http://www.jacar.go.[...]
陸軍省-西南戦役陸軍事務所
[113]
웹사이트
明治10年 「大日記 進達諸達伺の部2月令 陸軍省第1局」(11の4)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17-09-23
[114]
웹사이트
4月28日 陸軍大尉 高島三造他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17-09-23
[115]
웹사이트
第2号 10年4月16日~10年9月4日 (熊本連絡以来之)戦闘等月日及地所 軍団別働狙撃大隊第1中隊長 粟飯原大尉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16]
웹사이트
薩摩国桑原郡深川村戦闘報告表 軍団別働狙撃隊第3中隊長 大尉 久芳光直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17]
웹사이트
教導団工兵第1大隊人名及人員計92名土屋大尉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19-01-27
[118]
서적
新選組組長 斎藤一
PHP研究所
2011
[119]
웹사이트
士官心得 村井清 遊撃歩兵第5大隊長勤務申付候事他
http://www.jacar.go.[...]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20]
웹사이트
士官心得 粟屋市太郎 遊撃歩兵第7大隊長勤務申付候事他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18-12-16
[121]
웹사이트
発 瀧野軍医補 宛 西郷中将 遊撃歩兵第7大隊附の任御請申上候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18-12-16
[122]
웹사이트
各中隊現人員表9、10調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18-12-16
[123]
웹사이트
4月11日 陸軍軍医試補武谷豊 東京鎮台砲兵第1大隊付申付承諾の件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19-01-03
[124]
웹사이트
東京鎮台砲兵第1大隊第1小隊人員表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19-01-03
[125]
웹사이트
東京鎮臺砲兵第1大隊第2小隊他1名辞令発令の件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19-01-03
[126]
웹사이트
9月30日 予備砲兵第1大隊計官被免征討軍団付被仰付 軍吏副野崎貞知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19-01-03
[127]
웹사이트
出征第2旅団砲兵第4大隊第2小隊人員表10月2日調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19-01-03
[128]
서적
九州砲兵慨史
山吹会事務局
1986-04
[129]
문서
各府県の剣客からなる部隊
[130]
간행물
高田吉岳大尉のことなど
佐伯史談
1984-02
[131]
웹사이트
7月11日 陸軍会計2等副監督 小池正文他
http://www.jacar.go.[...]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32]
서적
従西日記
青潮社
1988
[133]
문서
2月19日に勅使護衛の歩兵第1・8連隊所属の2個大隊をもって臨時編成
[134]
문서
6月19日に左半大隊が、8月3日に残りの右半大隊が編入
[135]
웹사이트
8月24日 松田中尉関係人員、馬数(将官上長、伝令騎乗用等)
https://www.jacar.ar[...]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18-12-16
[136]
문서
4月26日に歩兵第11連隊第1大隊第2中隊半、歩兵第6連隊第3大隊第3中隊、歩兵第9連隊第3大隊第1中隊、歩兵第11連隊第2大隊第1中隊の4個中隊で臨時編成
[137]
웹사이트
久留米絣(4)信頼されるブランドへ
https://kbc.co.jp/ky[...]
九州朝日放送
2022-07-23
[138]
웹사이트
地域が誇り進化し続ける、久留米絣
https://www.muji.net[...]
良品計画
2014-07-30
[139]
웹사이트
「久留米絣」の創始者・井上伝と「東芝」の創業者・田中久重の意外な繋がりとは?
https://www.motoji.c[...]
銀座もとじ
2022-03
[140]
문서
金子260-267頁。
[141]
문서
翌年に発生した竹橋事件を受けて、徴兵により集められた兵士達への精神教育が重視され、軍人訓誡(後に軍人勅諭)が出されるが、自由民権運動への警戒も相まって共和制のフランス陸軍から君主制のドイツ陸軍へと、日本陸軍の導入モデルが変化した。
[142]
문서
「参第二千八百九十九号 スナイドル銃一萬挺改造之儀ニ付伺 スナイドル銃 一萬挺 此入費概算金三萬三千円 右先般同銃壱萬挺改造御達相成直ニ着手現今火造リ方大砲成功相成候処該銃予備来タ充分ニ無之且工廠之内平閑之場所出来候ニ付当前書之通改造相成度御達案添此段相伺候也 局九百九十六号 第三局長代理 明治十一年十二月十六日 陸軍大佐原田一道 陸軍卿山縣有朋殿 追而該入費者小銃並ニ弾薬製造費十八万円余之内ヨリ御払出相成度此段申添候也 砲兵本廠ヘ達案 スナイドル銃 一萬挺 右在来エンヒール銃ヲ以改造可取計此旨御達」
[143]
문서
1884年(明治17年)の秩父事件で蜂起した農民達は、火縄銃と手投げ弾で武装していた。
[144]
웹사이트
「SNSによる国民世論の分断」と「西南戦争における警察の役割」に関する諸考察
http://asss.jp/repor[...]
警察政策学会
2020-04
[145]
웹사이트
警視庁、創立140年の特別展で「重大事件100」発表 オウム真理教事件や西南戦争も
https://hatenanews.c[...]
2014-03-20
[146]
웹사이트
神話の源流〜はじまりの物語 運命の出逢いを辿る延岡の旅
http://www.kanko-miy[...]
[147]
웹사이트
『西南役伝説』(石牟礼 道子):講談社文芸文庫
https://bookclub.kod[...]
講談社
[148]
문서
메이지 초기 가고시마 현에 존재한 학교의 호칭.
[149]
문서
단, 서한 중에는 어린 군주가 급히 서두르지 않게 하기 위해 이 우나기 온천을 떠날 수 없다고 기록한 점에서, 이 '일으키기로 결심한'은 내란보다는 당시 사이고가 염려해 둔 대(對) 러시아를 위한 방어, 외국 정벌의 의미였을 가능성이 높다.
[150]
문서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에 의해 일어난 일본 최초의 양식 산업군의 총칭
[151]
문서
나중에 포박된 나카하라가 사이고 암살 계획을 '자백'하여 흥분한 많은 사학교 학생은 사이고 암살계획을 의심 없이 믿었지만, 다니구치가 이를 암살계획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사이고를 '시찰(視察)'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나카하라의 말을, 냉정한 인간이라면 '시찰'이라 알아들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카하라를 줄곧 의심하고 있던 다니구치가 '척살 (刺殺)'로 잘못 들은 것이 아니냐고, 후에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추측하고 있다.('시찰'과 '척살'은 일본에서 똑같이 'しさつ'로 발음된다) 다니구치 도타는 사쓰마 군 괴멸 후에도 살아 남아 체포, 투옥된 후에 가고시마에서 살았으며 1933년 죽을 때까지 사이고 암살 계획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52]
문서
사이고가 말한 “ちょしもたー”의 의미에 대해서는 사이고가 궐기에 신중했다 혹은 적극적이었다고 생각하는 양쪽에 입장에 따라서 의견이 갈라진다.
[153]
문서
심한 고문을 받은 나카하라였지만 3월 10일에 바닷길로 가고시마에 들어온 칙사 야나기하라 사키미쓰 일행에게 구출되어 도쿄로 이송되었다. 후에 고치 현 경부장, 야마나시현 경부장, 후쿠오카 현 경부장을 역임했다.
[154]
문서
『신편(新編) 세이난 전사(西南戰史)』등에서는 이케노우에의 안이 채용되었다고 하고 있어, 그에 따라 가와지리(川尻) 군의에서 이케노우에의 주력 상경, 일부 방비하자는 안과 시노하라의 전군강습안과 대립하여, 후자로 결정된 점에서 추측하면, 이때의 결론은 만연했던 육로 상경책이었던 가능성이 높다. 가와지리에 먼저 도착한 벳푸 신스케에게 구마모토대의 이케베 기치주로가 계책을 물었을 때, 벳푸가 계책은 없다고 대답했다는 구마모토대의 『전포일기(戰袍日記)』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155]
문서
궐기 당초 사이고군이 나가사키 탈취를 중시한 이유는 당시 나가사키가 일본 최대의 국제무역항이었던 점과 관계가 있다.
[156]
문서
사학교 근처의 구 목장. 『신편 세이난 전사』 및 시바 료타로의 소설 『나는 것처럼(翔ぶが如く)』 등 열병이 있었던 연병장을 이시키(伊敷)연병장으로 표기한 것이 많지만, 모두 오류이다. 《세이난 전쟁에 대한 사쓰마군 출진의 「연병장」에 대해서》
[157]
문서
일본에서의 최초의 전신은 1869년(메이지 2년)쓰키지(築地)와 요코하마의 거류지 사이를 이어, 상하이 ~ 나가사키 간에 해저 케이블이 부설되어 여러 외국과의 전신이 개통된 것은 1871년(메이지 4년)이었다.
[158]
문서
드라이제 총은, 스나이더 총보다 선진적인 볼트액션식 후장총이었지만, 사용하는 탄약이 종이로 만든 탄피였기 때문에 스나이더 용의 금속 탄피보다 비나 습기에 약한 점과, 유지를 소홀히 하면 가스 누출이 발생하는 점이 흠이었다.
[159]
문서
샤스포 총은 당시 일본에 존재한 보병 총 중에서는 선진적인 총이었으며, 무라타 쓰네요시는 샤스포 총을 금속 탄피용으로 개조한 그래스 총의 국산화를 목표로, 그 연장 상으로 무라타 총을 개발하였다.
[160]
문서
이것을 일본 방송 협회|NHK의 《그 때, 역사가 움직였다.》에서도 채택하였다.
[161]
문서
사쓰마 군은 전통적으로 시현류라는 검술을 익히고 있었는데, 위에서 아래로 온몸의 힘을 실어 내리치는 이 검술에 상대의 칼이 부러지는 수도 있을 정도로 위력은 엄청난 것이었다고 한다.
[162]
문서
다바루 언덕에서의 격전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는 신정부군 소대장 30명 중 11명이 목숨을 잃은 점에서도 살필 수 있다.
[163]
문서
메이지 시대 초기 육군 군단을 이르는 총칭
[164]
문서
세이난 전쟁의 자금조달로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해소하기 위해,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펼친 디플레이션을 유도하는 재정정책
[165]
문서
사쓰마 사족 병사들의 거친 돌격이나 백병전을 보고, 일본군은 백병전을 중시하자는 의견도 있지만, 이 이후에도 위에 서술한 대로, 메이지 유군은 여러 외국처럼 화력우세(총포 화력의 우열이 승패를 결정하는)를 채용하고 있다. 사이고 군의 백병전이 강했던 것은, 지형이 사이고 군에게 유리한 점과, 어릴 적부터 도검에 익숙한 사족과, 훈련이라 해도 몇 년밖에 안된 징집병으로는 단련 수에 대단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백병전을 중시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연구를 통해 채용된 침투전술에 의해 백병전투가 많이 발생할 것이라는 예견에서였다. 실제로 침투 전술이 대규모로 실시되었고, 각지에서 가혹한 근거리 전투가 발생한 제2차 상하이 사건에서의 일본 병사의 주무기는 수류탄이나 척탄통이었으며, 소련군 8월 공세 당시 소련병이 총칼에 의한 전통적인 백병전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166]
문서
다음해 발생한 타케바시 사건(竹橋事件)으로 징병보다 모인 병사들의 정신교육이 중시되어, 군인 훈계 (후 군인칙유(軍人勅諭))가 나오게 되었지만, 자유 민권 운동으로의 경계와 함께 공화제인 프랑스 육군에서 군주제인 독일 육군으로 일본 육군의 도입 모델이 변화하였다.
[167]
문서
1884년 일어난 지치부 사건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화승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